- 오늘세계
- 2016/07 제18호
SEIU, 왼쪽으로 사회운동으로
북미서비스노조 대의원회에 다녀와서
SEIU(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 북미서비스노조)는 공공, 민간부문의 서비스 노동자를 조직하는 200만 명 규모의 미국 최대 산별노조다. 지방공무원과 장기요양 노동자들로 구성된 공공서비스분과, 간호사를 비롯해 각 직종의 병원 노동자가 속한 보건의료분과, 청소, 경비와 공항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시설관리분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가 같은 업종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략조직 사업에 힘을 쏟는다는 점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아 교류해 왔다. 이런 인연으로 SEIU는 올해 5월말 디트로이트에서 개최한 대의원회에 공공운수노조 위원장과 국제국장, 필자 등을 초청했다.
이번 대의원회는 “멈출 수 없는 SEIU”(SEIU–Unstoppable)라는 모토로 진행되었다. 4년마다 진행하는 대의원회인 만큼, 구체적인 사업 계획보다는 4년 이상의 활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매년 열리는 한국의 산별노조나 총연맹의 대의원회가 1년짜리 사업을 심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의원회는 미국과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등 북미 지역에서 3000여명이 참석하여 5일 동안 진행되었다. 앞의 이틀 동안 특성·분과별 회의가 열렸고, 대의원회 본회의는 사흘 동안 12개의 안건을 다루고 규약 개정, 임원 선거를 진행했다.
사회운동의 성장을 담아
12개의 안건이라고는 하지만, 집행부가 제출한 17여 개의 결의안과, 지부들이 제출한 23개의 결의안을 병합해서 심의한다. 집행부가 제출한 안건에 대한 찬반, 수정 토론이 중심인 한국의 대의원회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더 큰 차이는 안건의 상당수가 수년간 미국 사회운동의 성장을 반영하고, 그것을 노조의 운동으로 수용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2012년 대의원회의 구호가 당시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반영한 “99퍼센트의 승리를 위한 투쟁”이었던 것처럼 이번 대회의 결의안도 정세를 적극 반영하려는 의지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강조된 것은 SEIU가 주도한 ‘최저시급 15달러와 노조 결성’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노동조합의 캠페인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넘어선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SEIU가 미조직 최저임금 노동자 당사자를 조직하는 것과 함께 기존 조합원들을 이 운동에 동참시키는 데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회장에서 만난 한 지방공무원 대의원은 “최저임금 노동자의 처지가 개선되어야만, 우리의 노동조건도 개선될 수 있다”며 정규직 조합원들도 최저임금 캠페인에 참여한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와 함께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살인이 반복되면서 일어난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수용한 제도적 인종주의 철폐 결의안, 기후변화 대응 운동을 반영한 환경정의 운동 결의안, 이민법 개정 운동을 반영한 결의안 등이 주요 의제였다. 특히 이러한 사회운동의 과제를 조합원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하고 노동자의 요구로 재구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환경정의 안건을 다룬다면,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가장 피해를 받는 것은 우리 조합원, 바로 저임금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운동에 동참한다는 접근이다.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노조의 안팎에서 벌어진 사회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더불어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으로서 조합원의 이해·요구와 사회운동 사이의 구체적인 매개를 찾고 연결시키는 데에서 한국 노조운동의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저임금, 불안정, 유색인 노동자들 일어나다
인종정의와 이민법 개정 운동 역시, ‘우리 조합원의 요구’라는 점이 중요했다. 실제로 SEIU가 저임금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조합원 중 유색인종은 40퍼센트에 이른다. 요양보호사, 청소, 경비 등 시설관리 부문은 비율이 더 높다.
시설관리분과 대의원회와 최저임금 15달러 운동 행사는 그런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던 흑인, 라티노, 아시아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쟁취했다는 발언은 참석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노조를 통해 유색인, 이주노동자들이 시민의 권리인 노동기본권 쟁취로 나서는 이 장면은, SEIU의 또 다른 구호처럼 ‘노동자가 일어나는(Workers Rising)’ 모습이었다. 노조가 인종정의와 이민법 개혁이라는 사회운동에 나서는 것은 이러한 조직화의 원인이자 결과인 셈이다. 노동조합의 조직화 운동과 사회운동이 한 장소에서 만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직화에서 조직혁신으로
이번 대의원회 주요 결의사항 중 하나는, “노동자의 승리를 위해 새로운 조직형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노동법제상, 노조가 단체교섭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업장 안에서 중앙노동위원회가 실시하는 교섭대표권 승인투표에서 과반수 직원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기업별로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노조 구실을 하기 어려운 셈이다. 그러나 SEIU는 사업장이라는 개념이 희미한 요양보호사 노동자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지방정부를 직접 압박하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단체교섭권을 행사하고 수십만 명의 요양보호사를 조합원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조직화 전략, 새로운 조합원이 새로운 조직형태로 이어진 것이다.
SEIU가 집중하고 있는 최저임금 15달러 운동을 통한 노조의 조직대상은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사용자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영세한데다가 고용이 불안정하다. 당연히 사업장단위로 노조를 인정받는 방식을 적용하기 힘들뿐더러 전체 산업 대표성에 이어질 수 없다. 노동자의 요구도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점에서 영세한 사용자를 대상으로 단체교섭을 일일이 진행할 일도 아니다.
이번에 SEIU는 ‘전국조직화위원회’(최저임금 운동에 함께하는 파트타임 노동자-자원활동가)의 노조 가입을 승인했다. 또한 법적으로 노조 가입을 아직 못했어도 SEIU 운동에 참여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성원으로서 대의원회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최저임금 15달러 사회운동, 그리고 이와 연계된 조직화 사업의 결과로 전통적인 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힘들었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SEIU는 21세기 노조다”
노동자의 존재조건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노조 형태를 시도하는 노력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실용적인 임기응변은 아니다. SEIU는 3년 전 <21세기 청사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노동자를 둘러싼 변화를 진단하고 대응하기 위한 미래 전략을 준비해왔다. 노조가 구성한 위원회는 다양한 전문가와 개방적으로 대화하면서 경제와 산업구조, 노동시장, 노동과정, 기술과 기업운영, 인구구조, 노동조합의 주체적 조건을 진단했다. 커다란 변화에 대비해 노동조합이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노동자가 파트타임, 외주용역으로 내몰리는 상황은 물론, 기후변화가 환경오염으로 이어지고, 택시노동자가 ‘우버(스마트폰 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서비스)’와 같은 서비스에 밀려나고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까지 등장하는 기술혁신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조는 더 긴 미래까지 시야에 넣어야하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제출한 노동조합의 운동방향에 대해 수개월간 노조의 중앙과 각 지부에서 현장간부 토론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세 가지 핵심 방향을 제안하게 된다. 첫째, 변화하는 조건에서 승리하기 위한 새로운 노동자 조직형태를 건설한다. 둘째, 더 넓은 사회운동을 건설한다. 셋째, 우리 노조의 모든 활동을 전면적으로 혁신한다.
대의원회의 결론은 이러한 제안을 SEIU 중앙과 지부, 산하조직들, 대의원과 집행간부가 모두 조직적 과제로 결의한다는 것이었다. 지속적인 추진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21세기 청사진 위원회>를 상설화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그럼 SEIU의 이런 변화에는 어떤 이념적 지향이 있을까? <21세기 청사진 위원회> 실무를 총괄한 데이비드 R. 스냅은, SEIU가 어떤 특정한 (좌파적인) 이념적 토대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더 왼쪽으로, 사회운동 노조주의로 분명히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국의 노조운동은 이념적 토대가 취약하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노동자운동이 갖는 이념적 급진성이 대중운동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답변이기도 했다.
SEIU 대의원회에 초청된 스웨덴 운수노조의 참석자는 축사에서, “SEIU는 21세기 노동조합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대의원회를 통해 SEIU가 보여준 지향을 함축한 표현이라 할만하다. 변화하는 세계,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역시 변모하지 못한다면 의미있는 사회운동으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1987년 3저 호황기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형성된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노동의 불안정화로 변모된 사회에 맞춰 얼마나 변화했는가.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21세기 노동조합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그 방향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SEIU의 도전에 우리 노동조합 운동을 비추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