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6/07 제18호

일상에 대한 낯선 상상

영화 <서프러제트>

  • 주연 다큐멘터리 감독
 
우리가 일상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 누군가를 억압하면서 유지되는 것이었다면?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평범한 날들은 억압적인 일상이 된다. 눈앞의 환상이 사라지고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를테면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7살부터 17년간 세탁공장 노동자로 일해 온 모드와츠(캐리 멀리건 역)가 고용주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어린 여성 동료를 목격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놀란 그녀에게 남성 고용주 테일러는 다가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건넨다. 모드와츠는 숨을 죽인 채 묵묵히 일을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억압적인 일상을 직시하고 나면 누구라도 그 곳에 멈춰 있을 수 없다.

<서프러제트>는 여성이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한다는 말이 허황된 소리처럼 들렸던 1912년을 무대로 한다. 동명의 여성참정권 운동단체 ‘서프러제트’의 이야기는 세탁공장의 한 여성 노동자 모드와츠를 통해 스크린 위로 옮겨진다. 어떻게 평범한 한 여성이 그 시대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치단체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었을까. 여성참정권은 실현되었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일상적 억압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100여 년 전 그녀가 일으킨 일상의 변화는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평온한 가정이라는 환상

여성에게 참정권을 달라는 정치적 요구는 공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사적인 영역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다. 선거법 개정을 위한 국회 증언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모드와츠에게 남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뭐하려고?” 모드와츠는 답한다. “당신과 똑같아. 나도 내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녀의 말을 ‘가정에 충실하라’라는 가장의 권위로 잠재우려 한다. 바로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사랑하는 아내가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행위가 남편에게는 왜 부정적인 일이 되었을까? 영화는 직접적으로 그 이유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는 영화 속에서 잠깐씩 등장하는 식사와 육아 등 가사활동을 전담하는 모드와츠의 일상을 통해 짐작할 뿐이다. 평온한 가정이라는 세계는 바로 아내의 희생을 은폐시키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편의 심드렁함은 이 세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은 아닐까. 

20세기 초, ‘서프러제트’라는 단체가 나오기 전까지 남성들만의 정치 참여는 특권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했던 권리가 ‘부조리’로 명명되는 순간, 남성들은 더욱 더 기존의 세계를 공고히 하려 한다. 이 역시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일 것이다. ‘서프러제트’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법과 언론은 더 강력하게 그녀들을 제압한다.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공과 사의 밀착관계 속에서 모드와츠가 깨닫는 것은 지금껏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가정과 공권력에 대한 환상이다. 
 
 

새로운 여성성/모성에 대한 상상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기 전 모드와츠에게 삶의 전부는 어린 아들이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시위에 휘말려 경찰서에 끌려온 그녀는, 어린 아들을 데리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공장에서 고용주의 성폭행을 목격하고, 가정에서 남편의 가부장적 권위에 짓눌리고, 사회에서 정치의 참여를 제한당하지만, 번번이 부당한 현실을 ‘엄마’라는 말로 묵인한다. 이때 모성은 배타적으로 기능하며,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기 위한 알리바이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이 타인의 현실로 연결되고 확장될 때, 모성은 연대의 가능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 모드와츠는 남편에게 묻는다. “우리가 딸을 낳았다면 그 딸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남편이 답한다. “당신과 같은 삶을 살았겠지.” 모성의 대상이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으로 확장되었을 때 모성은 연대라는 커다란 그림의 시작이 된다.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고 난 후, 동료 바이올렛의 딸을 대하는 모드와츠의 태도는 극적으로 변한다. 영화의 초반 성폭행을 당하는 바이올렛의 딸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그녀는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바이올렛의 딸을 구출한다. 비록 고용주 테일러를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여성 연대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이올렛에게 그녀의 딸에 대해 이야기한다거나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녀들의 언어’를 찾는 과정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를 외치는 여성들이 그들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공식적인 발언권을 얻은 모드와츠가 처음 했던 말은 “모르겠다”였다. 법의 세계에서 모드와츠는 온통 남자 정치인들에게 둘러싸인 증언석에 서 있어야만 했다. 합법의 세계에서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그녀들의 저항(도시의 우체통이나 공기관을 폭파시키는)은 그녀들만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서프러제트’의 목적은 단순히 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드와츠가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메릴 스트립 역)의 책을 펼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그녀는 악덕 고용주가 있는 일터를 그만뒀고, 가부장이 지배하는 가정을 벗어났으며,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양육권과 참정권의 부당함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당혹스러움을 동반한다. 그녀는 이제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없고,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잃었으며, 안정적인 수입마저 잃게 되었다. 억압이 분리된 일상은 통쾌함보다는 혼란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억압에 맞선 저항은 일상의 비틀림으로 길을 잃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일상이 흔들렸을 때 우리는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끝났지만 여전히 일상은 우리 주변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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