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6/06 제17호

블랙리스트에 맞선 헐리우드의 천재 작가

영화 <트럼보>와 매카시즘 비판

  • 박문칠 다큐멘터리 감독
 
<트럼보>는 미국의 괴짜 같은 천재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Dalton Trumbo; 1905년 12월 태어나 1976년 9월 세상을 떠남)의 생애에 관한 전기영화다. 그는 세계 영화팬에게 널리 알려진 <로마의 휴일>(1953)을 써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 부와 명성을 손에 넣기도 했지만, 약자의 편에 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트럼보는 1943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을 하고, 헐리우드 내 여러 파업에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작업이 시작되었고, 트럼보와 그의 친구들은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이른바 ‘헐리우드 10인방’이라 불리던 이들은 헐리우드까지 몰아닥친 전 사회적 반공주의 열풍 탓에 국회 청문회장에 불려 다니고, 옥살이도 하는 등 광기어린 마녀사냥의 제물이 된다.
 

익숙한 광기

영화는 매카시즘이 불어닥친 당시의 헐리우드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트럼보의 고군분투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책에서나 봤을 법한 전후 매카시즘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냉전 논리가 판치던 당시의 풍경은 결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옥죄는 풍경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범죄 사실이 없음에도 전국민이 보는 청문회장에 세워놓고 사상을 밝히라고 강요하거나, 애국자와 반역자로 사람들을 편가르는 모습은 종북몰이가 횡행하는 최근한국사회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특히 문화예술계를 향한 이념적인 공세는 최근 우리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부산국제영화제 사태를 연상케 한다. 영화제가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은 영화를 상영했다고 정치적 보복을 가하는 한국이나,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문제아’들을 솎아 내려고 한 4~50년대의 미국 헐리우드나.

대중적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은 이렇듯 언제나 권력자들이 길들이고 싶어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반공을 내걸고 자행되는 폭력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트럼보가 어떻게 이 상황을 ‘작가답게’ 타개했는지 보여준다.
 

‘작가답게’ 싸운 트럼보

옥살이를 겪은 후, 트럼보와 이른바 ‘헐리우드 10인방’은 헐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어디서도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간 부와 명성을 누리며 ‘풀장 공산주의자’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였던 트럼보는 친했던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워나가기로 한다. 승패의 여부가 자신의 손을 떠나 있는 법정이나 정치권에서 싸우기보다는 본인이 제일 잘 알고, 또 잘 할 수 있는 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 마치 게릴라들이 엄청난 화력과 돈을 필요로 하는 정규전 대신 익숙한 지형지물을 활용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에게 타격을 가하듯, 그는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링을 찾아 승부를 내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었다. 아주 많이, 그리고 잘. 그는 헐리우드가 좋은 시나리오에 늘 목말라한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당장의 생계난을 해결하기 위해 삼류 상업 스튜디오를 찾아가 가명이나 대리로  시나리오를 헐값에 써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감이 많아지자 블랙리스트에 함께 올랐던 동료들에게도 일감을 나눠준다. 곧이어 트럼보는 이것이 블랙리스트를 사실상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싸구려 시나리오를 기계처럼 써내려가는 와중에도 그는 작품성 있는 시나리오─<브레이브 원>(1956)─를 완성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는 시상식장에 나타날 수 없다. 실체가 없는 유령 작가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다시 A급 감독 및 배우들의 작품 의뢰를 받게 되고, 이런 수요를 지렛대 삼아 실명으로 영화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올리고, 마침내 악명 높은 블랙리스트를 사실상 무력화시킨다.
 
 

개인기가 아닌, 전승되는 역사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점은 이렇듯 트럼보가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블랙리스트라는 탄압을 비틀고, 끝내는 해체시켜버린다는 점이다. 견고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 바로 이러한 창의성과 기지가 아니겠냐고 영화는 묻고 있는 듯하다.

물론 트럼보의 경우, 업계 최고급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게릴라전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도 실제로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리다보니, 그 사람의 뛰어난 개인기와 영웅담이 강조되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비판을 의식했는지 영화는 지난한 투쟁을 함께 한 여러 동료와 가족의 이야기를 포함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큰 딸 니콜라와의 갈등과 화해다. 트럼보가 블랙리스트를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밤낮 없이 시나리오를 쓰는 사이, 그는 의도치 않게 가장 소중한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물론 주인공의 미션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런 식의 가족 내 갈등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트럼보 부녀의 갈등과 화해에는 색다른 울림이 있다. 

아버지의 싸움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딸은 당시 불붙기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처음 아버지 트럼보는 그녀를 인정해주지 않고, 자기 필요에 따라 멋대로 부리려고만 한다. 그랬던 아버지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마침내 그녀를 독립적 개체이자 동지로 인정해줄 때, 뭔지 모를 뭉클함이 전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둘의 관계가 생물학적 부녀지간을 넘어서 사회정의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동반자이자 선후배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니콜라는 단순 조력자 역할을 넘어 투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아버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그녀를 통해 우리는 트럼보 개인의 투쟁이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승되는지 엿볼 수 있다.

영화는 트럼보의 투쟁을 함께 한 다른 동료들, 당국의 압력에 못 이겨 배신을 한 다른 영화인들의 고뇌도 함께 아우르고 있다. 트럼보의 일대기가 단지 한 천재의 외로운 투쟁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한 시대를 함께 했던 모든 이들의 투쟁이자, 회한과 기쁨이 공존하는 역사임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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