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 2016/06 제17호
도구가 된 인간, 아물지 않은 상처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 서평
“호모 파르페 말이야.”
“파르페가 아니고 호모 파베르라니까.”
“파르페가 아니고 호모 파베르라니까.”
책의 주인공인 SJM 조합원들도 제목을 헷갈리곤 한다.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단어가 어려워 디저트로 먹는 음식인 파르페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야만의 새벽’을 잊을 수 없어 그날의 식탁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아직 후식을 먹고 있는지도 모른다.
승리했지만 남은 패배의 기록
2012년 7월 27일 새벽 안산의 자동차부품회사인 SJM에 용역깡패들이 난입했다. 같은 날 만도에도 용역깡패가 투입되었다. 그 전부터 발레오, 유성을 비롯한 수많은 사업장에 직장폐쇄, 용역깡패의 난입, 노조의 무력화와 친회사 노조설립 등이 반복되고 있었다.
SJM에서 우린 노조를 지켰다. 노무관리 이사와 용역깡패회사의 임원들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 노조파괴 기획에 당한 대부분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구속되고 노조가 깨졌던 경험과는 정반대였다. 분명히 승리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극작가 이양구씨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노조가 이긴 건 분명한데 노동자들은 졌어요. 회사로 복귀했지만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그래서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는 승리의 기록이자 패배의 기록이기도 하지요”라고 했다. 그는 30명의 조합원을 꼼꼼하게 인터뷰해서 책을 엮었다. 노조가 이겼는데 조합원들이 졌다고? 조합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노조인데 왜 이런 평가를 했을까?
지난 3월, SJM 조합원 교육을 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SJM 노사관계에 대해서 묻자 다수의 조합원들은 “악화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제는 노사 모두가 경험을 통해 뼈저린 교훈을 얻어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법한데 의외였다. 조합원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일상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의외였다. 돈, 건강, 긴 노동시간이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답이 제일 많았다. 교육이 끝나고 왜 4년이 지난 지금도 SJM 조합원들은 그날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이야말로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의 새벽
깡패들이 쳐들어올 때, 수많은 조합원들이 쇠파이프 대신 카메라와 휴대전화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찍었다. 용일이는 화염병 대신 펜을 들고 기록했다. 화염병이나 쇠파이프보다 펜과 휴대전화가 더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SJM에서 깨달았다.
깡패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선심누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우리가 왜 나가냐”였다. 그러면서도이 순박한 누이는, 회장이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려면 노조를 깨고 싶을 거라며 “부모 마음은 다 그래. 내 자식 편하게…”라고 했다. 이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부모인 SJM 조합원들이 회사에 맞서 싸웠다.
머리가 깨져 피 흘리며 싸운 정준위는 자신이 만들던 제품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도구화된 인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이것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당시 입사한지 3개월 된 경원이는 비정규직이었지만 그 무자비한 야만의 충격에도 떠나지 않고 함께 싸웠다. 당시 비정규직 5명이 함께 싸웠는데 나는 그때 그들을 ‘독수리 5형제’라 이름 붙여 선전물을 냈었다. 정규직도 아니고 오래된 직장도 아닌데 왜 떠나지 않고 함께 싸웠을까? 그는 “제 자존심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자존심은 세운 것 같다”고 한다. 이 신참 조합원은 “노동조합은 이익집단이긴 하지만 이익집단을 넘어 정의에 앞장설 수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한다.
이승호 조합원은 그 야만의 새벽이 찢고 부러뜨린 것은 살과 뼈가 아니라 ‘인간관계’였다고 한다. 이들을 보고 나는 ‘노조는 관계다’라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조는 ‘자존감 발전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조의 개념을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조합원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스승들이다. 나는 그 어떤 위대한 철학자와 사상가보다 이런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배운다. 4년 만에 책을 통해 듣는 이 스승들의 얘기에서 아직 남은 상처를 본다. 싸움에서 이긴다고 상처가 쉽게 아물지는 않는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음 세대의 희망을 생산하는 작업
나는 6~70년대 농사짓다가 올라와 산업화시대를 이끈 노동자들을 1세대, 8~90년대에 농부와 광부와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학교를 다니다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를 이끈 노동자들을 2세대, 2000년대 이후의 노동자들을 3세대로 구분한다. 나의 스승들은 대부분 2세대 노동자다. 《호모 파베르의 인터뷰》는 야만의 새벽 당시만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고향에 대한 기억부터 꼼꼼히 담아내고 있다. 전형적인 2세대 노동자가 가진 삶의 맥락을 드러냄으로써 도구가 된 이들을 인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SJM 조합원들과 함께 싸운 지역의 노동자들 얘기가 등장하지 않아 아쉽긴 하다. 이들의 대응은 쌍용차나 유성 등의 경우와는 달랐다. 책에서 이런 내용을 파헤치고 있지는 않다. 지회장이던 김영호의 인터뷰에서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는 짧은 문구들을 통해 간혹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도구가 된 인간의 아물지 않은 상처뿐만 아니라 희망을 생산하는 작업 중인 사람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미래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늘 새로운 세대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곤 한다. 내가 만난 2세대 노동자들은 그들의 행동과 생각을 통해 3세대 노동자들과 3세대 노동운동이 가야할 길을 이미 개척하고 있다.
물론 노동자들의 투쟁을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가슴 벅찬 승리, 뼈아픈 패배의 경험에서 앞으로 우리가 내딛어야 할 길을 두 세대가 함께 찾아나가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