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평등
- 2016/06 제17호
만덕마을은 어디로?
가난한 주민을 내쫓고 집 장사에 나서는 한국토지주택공사
조금 높은 곳에서,조금 멀리,
우리 얘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답은 그들에게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 망루 농성 18일차, 만덕주민공동체 최수영 대표 영상편지 중
용산참사 진압 책임자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던 날, 철거민이 9m 철탑에 올랐다. 금정산자락 산동네 만덕마을이 개발구역으로 묶이자 그 많던 주민들이 대부분 떠났고 마을은 거의 부서졌다. 하지만 아직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노동절 전야,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들과 함께 만덕마을을 찾았다.
만덕의 노동절 전야는 아름다웠다. 평균연령 50세가 넘는 현장노동자로 구성된 416문선패가 춤을 추고 산하밴드의 기타 반주에 맞춰 사람들은 30년 된 노래를 불렀다. 낡은 창틀과 문짝 따위를 연료 삼은 불이 오래도록 쓰레기들을 태웠고 불씨가 세찬 바람에 흩날렸다. 철거민의 밥을 실은 밧줄이 올라가고 빈 그릇이 내려왔으며 사수대가 교대를 했다. 부산반빈곤센터 윤웅태 대표 노제를 지내던 날 구슬피 울었다는 커다란 개가 이따금 짖었다. 긴장이 흐르는 평화로운 밤이 깊어가는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망루가 세워진 옥상에서 내려오던 주민 한 분이 무너지는 담장에 깔렸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개 짖는 소리만 컹컹 들려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노래는 다시 이어졌지만 이곳이 주민들의 삶이 위태롭게 내몰린 ‘철거지역’이라는 사실은 선명하도록 새삼스웠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만덕마을은 1970년대에 조성되었다. 정부가 부산시 동구, 영도구의 산동네 판자촌 주민들을 모아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이 만들어졌다. 노점상,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처음엔 천막을 치고 살다가 상환 조건을 내건 정부 지원을 받아 벽돌집을 지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그 수는 1553 가구에 달했다.
이제 칠순이 된 박정태 할아버지는 39년 전 이곳에 왔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한 할아버지는 고무 공장 일을 비롯해 안 해본 일 없는 노동자로 살았다. 문짝이며 창문이며 직접 구해 달며 땀 흘려 스스로 집을 지었고, 쫓겨날 일 없는 내 집이 있다는 걸 위안삼아 지내왔다. 이집 저집에서 먹거리를 들고 나와 평상에 모여 한잔씩 나누던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이렇다 할 노후대책은 없어도 살던 집에서 이웃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 자체가 든든한 일이었다.
어느날 만덕마을 건너편에 아파트가 한 채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였다. 산자락에 옹기종기 들어섰던 집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2001년 만덕1동의 이름이 만덕5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로 바뀌었다. 노인과 몸이 불편한 사람이 많아 주민들은 아파트가 들어서면 살기 좋아질 것이라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민간이 아닌 공공이 하는 개발사업이니 당연히 원주민의 주거권이 보장될 것이라 믿었다. 10년이 지나고 보상과 이주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주민들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LH는 2011년 9월 주민들에게 보상을 시작했는데, 그 기준은 2007년 공시지가였다. 2007년 한국토지공사와 한국주택공사가 합병하는 등의 여러 사정으로 보상시기가 늦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주변 땅값은 훌쩍 올랐다. 갈 곳이 없었다. 주민들이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부산 시내 곳곳에서 집회와 항의행동을 벌였다. 그러나 LH공사는 보상가를 조정하는 등 원주민 재입주를 위한 대책은 마련하지 않았다. 입주가 어려운 주민들에게는 부산 시내의 임대주택, 매입임대주택 등을 알선하겠다는 답만 되풀이했다. 주민비상대책위는 주거환경개선사업 지구 지정 해제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주민 대부분이 떠나고 이제 17가구만 남았다. 남은 이들은 갈 곳이 없으니 끝까지 싸우겠다며 농성 중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살 집’ 아닌 ‘팔 집’ 만드는 LH
만덕5지구 개발은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른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도시저소득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서 정비기반시설이 극히 열악하고 노후·불량 건축물이 과도하게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사업’이 주거환경개선사업의 법적 정의다. 민간업자도 안 나서는 낙후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업 방식은 싹쓸이 철거와 대단지 아파트 건설방식 일색이다. 달동네 주민들을 몰아내고 갈아엎은 땅에 대단지 아파트를 지은 지난 수십 년의 도시 개발 관행 그대로다. 민간이 조합을 구성해 초고층 아파트를 짓는 민간개발방식과 똑같은 개발을 LH공사가 특혜(지구 내 국공유지 무상 제동 등) 속에서 진행하고 있다. 집 값 폭등과 투기를 부추기는 주범이다.
현행 법제도가 보장하는 원주민 재정착 방안은 보상과 임대아파트 제공이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현실적인 보상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주변 전세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또한 내 몸 뉘일 집 하나뿐인 나이든 주민들이 세입자가 되어 떠돈다는 것 자체가 불안요소다. 3-40년간 마을을 일궈온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없다면 개발방식을 주택 수리, 개량 등으로 선회해야 하지만 LH공사는 부채 때문에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LH의 부채는 공공정책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민간건설사 미분양아파트 매입임대사업, 건설사 소유 토지 매입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부동산 거품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혈세를 끌어다 쓰는 것도 모자라 가난한 동네의 주거환경 개선을 명분 삼아 주민을 내쫓고 땅 장사, 집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LH의 행태가 만덕 주민을 저 위태로운 철탑 망루로 내몰았다.
갈 곳 없는 만덕주민의 절규, 부산시와 LH가 응답하라
2016년 5월 1일 부산역 광장에서는 노동자대회가 열렸다.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외침이 울려 퍼지는 역 광장 한쪽에는 <피란수도 부산, 역사투어> 홍보관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다리를 끊고 남하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며 부산은 1023일간 임시수도로 지정되었다. 당시 30만이던 인구가 120만으로 급속히 불었다. 피난길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영도다리에서 만나 눈물을 흘렸다. 가난한 피난민들은 영도, 초량, 수정 등지에 짐을 풀고 판잣집을 지었다.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그 자손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곳이 부산이다. 언덕배기 곳곳마다 다닥다닥 얼기설기 지어놓은 집들에 여전히 사람이 산다. 사람이 철탑에 매달린 지 한 달이 넘도록 여전히 부산시와 LH는 답이 없다. 도시를 일구고 땀 흘려 일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낸 도시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힘겹게 벽돌집을 지어 살던 사람들은 쫓겨나서 어디로 헤매야 하나. 또다시 산비탈, 물 위에 판잣집을 지어야 하나. ●
우리처럼 억울하게 헐려버린 마을들이 결코 하나 둘은 아닐 것이다. 물론 당국에서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오로지 손톱 밑에 비접(‘가시’의 전라도 사투리) 드는 줄만 알지, 염통 굉기는 줄을 모르는, 민이야 죽건 말건 명분 세우기에 급급한 파렴치한 소인배들의 옹졸한 생각이라고 밖에 더할 수가 있겠는가.
- 1978년 3월 16일 박흥숙 최후진술.
(언론을 통해 ‘무등산타잔’이란 별명으로 불린 박흥숙은 1977년 그가 살던 광주 무등산자락 판자촌에 불을 지른 철거반원을 살해한 죄목으로 사형되었다. 1970년대 도시빈민 철거투쟁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