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2016/06 제17호
가습기살균제 사태 낳은 무책임의 사회
옥시만 문제가 아니다
잠재적 피해자 최소 30여만 명, 중증폐질환 피해자 1528명, 사망자 239명.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사상 최악의 ‘생활용품 화학참사’다. 기업들은 유해성을 알면서도 이윤을 위해 17년간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해 왔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야기한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는 흡입 독성 실험을 누락했다. 2011년 12월엔 새 법인을 만들어 책임을 면할 방책부터 찾고 있었다. 옥시는 서울대, 호서대의 ‘청부과학자’들, 김앤장 로펌 등과 함께 실험을 인위적으로 짜맞춰 조작하고, 가습기살균제와 폐섬유화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보고서는 은폐하기도 했다.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기업은 옥시뿐 아니라 애경, 롯데쇼핑, 홈플러스 등으로 14개 제품, 24개 제조판매사가 있다. 특히 유통기업들(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GS리테일, 코스트코, 다이소 등)은 자체 PB제품을 판매했다. 살인원료의 공급은 SK케미칼 몫이었다. SK케미칼은 주요 독성성분 4가지(PHMG, PGH, CMIT, MIT) 중 PGH를 제외한 3가지 성분을 생산·공급했다. 기업들은 화학물질의 흡입독성을 알면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했고, 흡입용도인 줄 알면서 원료를 공급해왔다.
정부와 검찰도 공범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화학물질은 유해성 때문에 생산, 수입, 유통, 판매, 폐기 등 전단계를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화학제품은 환경부의 생활환경품, 식품의약안전처의 의약외품, 산업통상자원부의 공산품으로 분산 관리되고 있어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1996년 가습기살균제 원료 PHMG 제조 신고서가 제출되었으나, 환경부는 추가 독성 자료를 요구하거나 유독물로 지정하지 않았다. 2001년 제조사가 카페트 세척용으로 개발된 이 물질을 가습기살균제로 용도변경을 했지만 정부 당국은 모르고 있었다. 가습기살균제는 가습기 ‘청소’ 용도로 사용됐기 때문에 의약외품이 아닌 공산품으로 분류되어 산업통상자원부의 관할이 되었다.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규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산업통상자원부는 살균제를 제조사가 자율적으로 안전을 확인하는 ‘자율안전확인대상공산품’으로 분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2006~2008년 사이에도 원인불명의 폐질환자 보고가 발생했으나 ‘괴질’로 치부했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의 조사 결과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이 가습기살균제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이 이듬해 업체를 검찰에 고소·고발했으나, 검찰은 업체 측의 반론권을 보장하고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며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질병관리본부의 1차 피해조사는 2년이 지난 2013년에야 시작됐다. 정부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을 환경성 질환으로 인정해달라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묵살하다 피해구제 특별법이 통과되기 직전에야 환경성 질환으로 지정했다. 특별법 제정보다는 환경성 질환 인정이 보상 등에 있어 더 엄격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5년이 지난 지금에야 조사에 착수해 공소시효 논란을 자초하는가 하면, 수사범위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심지어 독성원료를 공급한 SK케미칼은 무혐의로 수사를 종료했다.
여전히 무방비 상태의 한국사회
한국과 달리 다른 나라에서는 옥시가 큰 문제가 된 바 없다. 옥시는 다국적 기업이지만, 문제가 된 가습기살균제는 한국에서만 판매됐다. EU에서는 유해성 정보가 확인되지 않은 물질은 시장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리치(REACH)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제도에 따르면 방충제, 소독제, 방부제 등 살생물제(biocide)는 인체에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절대 시중에 판매될 수 없다. 산업계의 반발로 계속 입법이 미뤄져 왔던 한국형 리치제도, ‘화학물질의평가및등록에관한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은 2011년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계기로 뒤늦게 제정되어 2015년부터 시행 중이다.
하지만 입법 과정에서 지식경제부의 반발로 유해금지 물질을 쓰는 제품은 신고해야 한다는 조항이 삭제되었다. 유해화학물질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도 환경부 소관에서 관계부처와 협의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가습기살균제처럼 화학물질이 처음 등록된 용도와 다르게 쓰일 경우 반드시 등록을 해야 한다는 조항도 사라졌다. 당시 화평법 저지 로비에 나섰던 전경련에는 SK케미칼, 애경산업 등이 소속돼 있다.
현재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화학물질이 4만 3000종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환경부에 등록되어 파악하고 있는 것은 510개 뿐이다. 이후 230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여전히 5퍼센트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다.
책임을 명확히
하인리히 법칙은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한국 사회의 화학물질 안전관리에 거대한 ‘구멍’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살인기업 처벌과 환경부장관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기업 처벌은 옥시 등 4개 기업이 공정거래위에서 받은 과징금 5천여만 원이 전부고,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지난 수많은 참사들처럼 사고 당시만 요란하고 책임자는 다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책임을 묻는 과정이 분명해져야 위험이 전가되는 구조적 문제가 드러날 것이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참사를 야기한 기업과 정부 관료에 조직적 책임을 묻고 처벌 할 수 있는 법제도 제정이 필요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