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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6/05 제16호

무책임의 사슬에 브레이크를 걸다

호주운수노조의 안전운임 투쟁과 책임의 사슬

  • 임월산 공공운수노조 국제국장
 
1970~80년대 이후 생산·공급체계의 글로벌화와 분절은 운수·물류산업의 기술발전 덕분에 가능했다. 이는 역으로 세계 운수·물류산업에도 성장과 변화를 가져왔다. 운수자본은 초국적기업에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경쟁하면서 외주화에 의존하게 됐고, 운수산업 분절로 산업 내 다단계 하청구조(운수공급사슬)가 형성된 것이다.
운수산업의 분절은 안전사고, 도로파손, 대기오염, 열악한 노동조건 등 운수산업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들의 책임 소재를 은폐한다. 그러나 최근 공급사슬의 문제점이 제기되고 노동조합이 대응하면서 이러한 현실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공급사슬 각 단계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명시하는 호주의 ‘책임의 사슬’ 제도다.
 

결정권은 화주, 책임은 노동자?

도로운송 공급사슬은 제품을 판매 또는 구매하는 대기업 화주, 화주의 물량을 관리하는 대형 물류회사나 주선업체, 이 업체와 계약하는 도로운송회사와 운송사의 하청을 받는 소규모 운송회사 또는 특수고용 화물노동자로 이루어진다. 나라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기본 구조는 세계적으로 동일하다. 

일반적으로 공급사슬의 정점에 있는 화주는 운송서비스에 지급되는 운송료, 화물이 움직이는 노선, 노동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조건을 결정하지만, 한 대의 차량도 소유하지 않으며 한 명의 화물운송노동자도 고용하지 않는다.

반면 공급사슬 맨 아래 단계에 있는 화물운송노동자는 운송회사와 운송회사를 통한 화주의 지시에 따라야만 하고, 안전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을 진다. 호주의 책임의 사슬 제도는 이 상황을 바꾼 것이다.
 
 

‘책임의 사슬’ 제도 도입 과정

76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넓은 영토를 포괄하는 호주에서 장거리 운송은 경제의 중핵이자,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따라서 1950~1980년대 운수산업의 탈규제화 이후 급속히 증가한 화물차사고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
1990년대, 다른 운전자의 사망사고를 낸 화물운송노동자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들은 관련 기업들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노동자가 아닌 다른 ‘단위(기업)’의 책임을 규정하는 제도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몇몇 진보적인 학자들이 화물노동자의 노동환경과 안전사고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통해 이들은 장시간 운행, 과적과 과속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고, 운송회사와 화주가 화물노동자에게 이 위험한 운전행위를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이즈음 등장한 ‘책임의 사슬’ 개념은 운송 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화물운송노동자를 제외하고 공급사슬에 참가하는 모든 기업에 안전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책임의 사슬 문제의식은 2004년 호주 도로운수개혁법이 제정되며 처음으로 전국적인 제도에 반영되었다. 도로운수개혁법과 주 차원에서 도입된 법률은 운전시간, 적재용량과 중량, 차량 상태 등 규정 위반에 대해 운수공급사슬에 참가하는 기업과 경영진의 책임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를 강제하기 위한 감시·단속과 처벌 제도도 만들어졌다.
 

분야와 국경을 넘어 확산되다

책임의 사슬 제도는 호주 철도나 버스, 해운 등 운수부문과 세계 다른 나라로 확산됐다.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어 탈규제화의 발생지 미국에서도 이 개념이 회자되고 있다. 

2015년 5월 월마트는 화물차 사고로 중상을 입은 여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여 책임의 사슬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작년 11월, 미국 연방자동차운송안전기관은 화주나 운송업체가 화물노동자에게 운행시간 제한, 상업면허 규정, 위험물질 규정을 위반하도록 강요하는 걸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하기도 했다. 

국제해사기구(IMO),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유럽경제위원회(UNECE)는 글로벌 공급사슬을 따라 움직이는 컨테이너의 안전한 취급방식을 제시하기 위해 ‘화물운송기구 포장 시행규칙’을 발표했다. 여기에도 화주(발송자), 포장회사, 선박회사, 철도나 도로운송회사와 화주(수령자)로 이어지는 책임의 사슬이 명시되어 있다.
 
 

한계와 잠재력

‘책임의 사슬’은 복잡한 공급사슬 내에서 가장 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보호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계도 많다. 공급사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지만, 정점에 있는 화주의 책임은 명확하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규칙위반이 발생한 후에만 법적 책임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상적 착취를 근절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지금의 책임의 사슬 제도는 일국적 차원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초국적기업의 세계 공급사슬을 통제하기엔 근본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이 대자본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투쟁한다면, 책임의 사슬이라는 문제의식은 굉장한 잠재력을 가질 수 있다.


호주운수노조의 안전운임 투쟁

호주운수노조는 20년 전부터 바로 이 투쟁을 하고 있다. 화물노동자들에게 위험한 운전행위를 강제하는 기업주를 폭로하는 활동은 책임의 사슬 제도 도입의 중요한 근거다.

또한 호주운수노조는 법제도에 뚜렷하게 반영되지 않은 화주의 책임을 제기하며 책임의 사슬 개념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2012년 통과된 ‘도로안전운임법’은 이런 노력의 성과다. 이 법에 따라 화주들이 책임져야 할 공정 운임(임금)과 지급 방식, 대기시간에 대한 보수 등 노동기준을 정할 수 있는 ‘안전운임심사위원회’가 설립됐다. 이에 따라 기업은 사고, 속도, 적재량 제한에 대한 기존 도로안전 규칙을 위반하지 않더라도 안전운임심사위원회가 정한 기준을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됐다. 이 제도 하에서는 노조가 심사위원회에 추가적인 기준 마련을 요구할 수 있고,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 단체협약 체결 권리도 부여된다.

책임의 사슬 제도를 안전운임법제도로 확대·강화한 것은 호주운수노조 투쟁의 중요한 성과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아니다. 장기적으로 호주운수노조는 도로운송부문을 통제하는 대표적 화주들이 좋은 운임과 노동조건을 보장하고, 노조를 인정하는 운송업체하고만 거래하도록 강제할 계획이다. 이는 산업 전체에 파급효과를 만들 것이다. 호주운수노조는 안전운임법 도입 후 이를 근거로 주요 유통업 대기업 화주와 안전운임협약 체결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책임의 사슬과 안전운임 개념을 초국적기업에도 적용시키는 국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10월 국제노동기구(ILO) ‘도로운수 안전 보건에 대한 노사정 회의’에서는 안전운임과 책임의 사슬 국제기준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사용자 대표들과의 어려운 교섭 끝에 ILO 사무처가 관련 국제 행동강령을 개발할 것을 주문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안전운임에 대한 국제기준이 제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이 문제의식에 근거해 초국적기업을 상대로 투쟁하는 사례가 생겼다. 네덜란드연대노조(FNV Bondgenoten)는 유럽 전역에 걸친 공급사슬을 가진 농업 대기업의 제품을 운송하는 폴란드 국제운전노동자 100여 명을 조직해, 화주가 안전운임을 보장하고 공급사슬의 중간단계를 없애도록 하는 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한국에서 책임의 사슬

한국에서 책임의 사슬은 아직 낯선 용어다. 하지만 한국의 화물운송노동자들은 호주운수노조와 비슷한 기간 동안 유사한 제도를 쟁취하기 위해서 싸워왔다.

한국 화물운송노동자들의 노조인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가 주장해온 ‘표준운임제도’에는 표준운임 지급에 대한 대기업 화주의 책임이 명시돼 있다. 2015년 부분적으로 도입된 과적 근절을 위한 화물연대의 대안 역시 화주, 운송회사와 노동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책임의 사슬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사실상 같은 문제의식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접근 방식은 호주와 다를 수 있겠지만, 책임의 사슬을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며 화주의 책임을 부각시켜야 한다. 동시에 책임의 사슬을 철도, 버스, 해운 등 여타 운수부문에도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최근에는 도로운송부문 뿐 아니라 공급사슬 전반에 대한 책임을 초국적기업, 재벌대기업에 묻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전략이 다각도로 모색되고 있다. 도로운송부문 책임의 사슬 논의 역시 이러한 전략 논의와 연결고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노동자운동의 절실한 과제인 ‘초국적기업 통제’를 실현하는 데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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