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6/04 제15호

시의 자리

영화 <동주>

  • 김영글 편집디자이너
대학 졸업 후 몇 해 만이었다. 지나는 길에 궁금해서 들러본 동아리방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삐걱거리는 노란 문부터, 낡은 소파와 벽의 낙서까지. 달라진 게 있다면 찾아오는 사람이 드물어 보인다는 사실 뿐이었다. 책장에는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는 시집들이 먼지로 덮혀있었다. 그리고 일 년 뒤 다시 찾아갔을 때, 동아리방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 방은 비워진 지 오래라고 누군가 일러주었다.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동주문학회는 망했다. 20대의 절반을 보낸 공간의 상실이 슬프긴 했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영어스피치 동아리도 신입생 모집이 쉽지 않은 마당에, 이력서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문학동아리야 두 말할 나위 있겠는가. 대중의 감수성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TV드라마와 케이팝이고, 시심(詩心)이라는 말은 농담에나 등장하는 간지러운 단어가 되었다. 언어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조차 시는 그 효용 가치를 의심받곤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시를 읽고 쓰는 일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행위인지를 자문할 차례인 것일까?

이 질문을 다시금 곱씹게 해 준 영화 <동주>가 지난 2월 개봉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손꼽혀 온 윤동주는, 그 이름을 따온 동아리의 추억 덕분에 나에게도 각별한 시인이었다. 그런데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단순히 윤동주 개인의 연대기를 그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석 달 차이로 태어나 같은 감옥에서 한 달 차이로 죽은 고종사촌 송몽규와의 관계다. 사후 70년 동안 한 번도 극화되지 않았던 시인의 삶이 스크린이라는 무대 위에 펼쳐진 것은, 곁에서 동고동락했던 젊은 혁명가 송몽규를 함께 조명했기에 가능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영화는 일제 말기 지식인 청년들의 고뇌와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각별한 친구이자 평생의 동료였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달랐다. 이준익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식물적 관념주의자와 동물적 행동주의자’라는 대비 속에서 시인 윤동주와 혁명가 송몽규의 캐릭터가 그려진다.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을 꾸짖는 연설을 할 만큼 당돌했던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많은 자극과 영향을 준다.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둘의 차이는 드러난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해 잡지를 만들 때, 송몽규는 “인민을 나약한 감상주의에 젖게 만든다”며 시라는 장르를 비판한다. 윤동주는 그 말에 괴로워하면서도, 시가 산문 못지않게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담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는 않는다. 시와 산문은 흔히 예술과 정치라는 더 큰 범주의 세계관으로 비교되곤 한다. 이 차이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차츰 겹쳐지기 어려울 만큼 벌려놓는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송몽규는 열여덟의 나이에 몰래 중국 남경에 갔다가 체포된다. 임시정부 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김구 일파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송몽규는 감옥에 면회 와서 왜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느냐 묻는 윤동주에게 돌직구 한 마디를 날린다. “너는 좋은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 테니까.” 이 말은 시국에 대한 근심과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던 젊은 문학청년 윤동주에게 따뜻한 격려가 아니라 냉정한 비판으로 다가왔다. 좋은 시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윤동주는 모국어로 쓴 시를 출판조차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괴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아름다운 시 대부분이 시인을 괴롭히던 그 부끄러움의 정서에 의탁해 쓰였다.
 
 
이렇듯 영화는 성장소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두 개의 자아가 대결하는 구도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그것을 이분법적 도식에 가두지 않고, 인간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어떤 면에서 윤동주는 송몽규의 그림자처럼 살았다. 일찍 신춘문예에 등단한 송몽규를 보며 열등감 속에서도 대기만성을 되뇌었고,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함께 응시할 때도 혼자 실패의 상처를 맛보았다. 송몽규는 일본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자신을 믿고 따르던 윤동주도 결국 체포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나 송몽규가 진정 영향을 미친 것은 윤동주 내면의 행로였다. 그들이 함께한 학업의 여정 역시, 공부를 통해 이루려는 많은 꿈들이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북간도 고향집에서부터 옥사하는 날에 이르기까지, 윤동주의 내면에서 ‘행동하는 자’와 ‘성찰하는 자’는 피아가 구별되지 않는 상태로 서로를 이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윤동주의 시는 그 과정이 남긴 대화였다.
 
1943년 7월 일본 경찰이 ‘학생지식 계급’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중,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불온한 그룹으로 얽혀 체포되었다. 당시 윤동주가 실제로 송몽규처럼 조선 독립운동에 몸소 뛰어들었는지, 아니면 몇 차례의 회동과 대화가 그가 참여한 일의 전부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현명하게도 영화는 그 대답을 스스로 내리려 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이라는 쉬운 길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저항시인 윤동주’라는 불투명한 관념의 실체에 직면하기 위해서다.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은, 윤동주의 옥사를 순수한 시인의 억울한 누명으로 보는 세간의 추측이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순수한 시’라는 것은 없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쫓기우는 사람”과 같은 시구의 의미를 따져 묻는 일본 경찰의 심문에 윤동주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권 잃은 시대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쓰여진 시는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과 얼마나 다른 값의 죄일까?
 

영화의 엔딩에서 윤동주는 자신에게 내려진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에 서명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쓰고자 했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며, 그 사실이야말로 진정한 죄일 거라고 통렬한 참회의 심정을 토해낸다. 야만적 시대의 우문에 대한 시인의 현답이었다. 스스로가 욕된 역사의 일부임을 직시하는 시인의 외침에 비하면 저항시인이라는 허명에 우리가 기대해 온 이미지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생략된 이야기지만 윤동주는 원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병원’이라는 제목을 붙이려 했다고 한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니 혹시 앓는 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의 생각은, 시의 가치와 쓰임에 대한 시인의 소박하고도 진지한 관점을 짐작케 한다.

다시, 시의 존재 이유라는 화두로 돌아가 본다. 시가 세상에 꼭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진실들은 산문으로 옮겨적고 나면 사라지고 만다. 명료한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마음도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최후의 보루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아는 마음,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스스로 이겨내고자 투쟁하는 마음일 것이다. 이란성 쌍둥이처럼 두 마음은 본래 하나다. 그들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자리가 진정한 시의 자리가 아닐까. 시대착오적인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윤동주의 시절에 그러했듯 앞으로도 우리 미완의 존재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 시가 살아남아 계속 시대와 불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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