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노조 할 권리
  • 2016/04 제15호

얼굴 없는 노동운동을 넘어

금속노조 SJM지회 김영호 전 지회장 인터뷰

  • 이민영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뭔가 달라져 있겠죠?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시그널>은 20년 전 누군가와의 대화라는 독특한 구성으로 전개된다. 2015년은 민주노총이 설립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2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밑거름으로 만들어진 금속노조 SJM지회는 민주노조 운동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어왔다. 2012년에는 이명박 정권의 노조 파괴 도미노를 멈추며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투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위한 단초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고민 중이다. 
 

몰아치던 노조 파괴 광풍 

이명박 정권과 자본은 2000년대 들어 조직화로 몸집을 불리고 있던 금속노조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금속노조 주요 사업장에 노조 파괴의 바람이 몰아쳤다. 공격적 직장폐쇄 → 용역깡패 투입 → 어용노조 설립 → 금속노조 무력화라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에 따라 발레오만도, KEC, 상신브레이크의 노조들이 힘을 잃었다.   

다음은 SJM지회였다. 회사는 2008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한화 출신의 강성 노무관리자를 이사로 앉히고, SJM홀딩스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했다. SJM 생산공장을 지주회사의 하청회사로 만들고, 설비를 제외한 모든 자산을 지주회사의 소유로 만들었다. 

준비를 마친 회사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았어요. 시비를 자꾸 걸기 시작했죠. 통근버스 노선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자체 운영하던 식당을 외주화했어요. 합의된 노조 활동 시간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임금도 삭감했죠.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당혹스러웠죠.”

당시 지회 집행부는 조합원들로부터 ‘왜 우리를 못 지켜주냐’, ‘왜 자꾸 후퇴하냐’는 원성을 들어야 했다. 불만의 화살이 집행부로 날아갔고, 회사는 그럴수록 더 밀어붙였다. 2011년 집행부가 바뀌자 회사는 더 세게 나왔다. 노조가 계약직을 쓰면 안 된다고 했지만 1년 계약직 5명을 출근시켰다. “직장폐쇄로 조합원들 쫓아내고 대체근무자가 필요하기도 했고, 노조를 위협하려고 갑자기 채용한 거였죠. 더 이상 대화로 풀 단계는 지났구나, 정면충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용역깡패하고 절대 싸우지 말라”

회사의 도발에 지회는 차분히 대응을 준비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어요.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고 그 경험을 토대로 대비를 하려고 했죠. 조합원들도 긴장했어요. 구역별 간담회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고 싸울지를 물었죠. 조합원들은 당연히 싸우자고 했어요.”
SJM지회 김영호 전 지부장

집행부는 싸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회에 가장 필요한 내용을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했다. “설비를 유지·관리하던 핵심 부서를 지명 파업시켰어요. 간부들이 아니라 회사가 생일까지 챙겨주던 중요한 부서였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 유성기업지회 홍종인 지회장 이야기도 듣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러면서 과반이 노조 쪽으로 오게 됐어요. 어용노조 위원장도 이 부서 출신이었어요.” 

회사는 타격을 입었다. 핵심기술자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기계가 수시로 멈춰도 봐줄 사람이 없어 대체생산이 제대로 안 됐던 것이다. 정상가동 자체가 어려웠기에 지회는 투쟁 장기화를 피할 수 있었다.

“‘용역깡패하고 절대 싸우지 말라’는 유성기업지회의 뼈아픈 조언을 철저히 받아들였어요. 용역과 싸움이 붙으면 진짜 적을 잊어버리고 조합원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거에요. 노조 파괴를 사주한 세력이 아니라 용역깡패와 싸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사장과 사장 아들만 친다’, ‘용역깡패와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세웠어요.”
 

노조 파괴 도미노를 멈추다 

2012년 7월 27일 회사는 급기야 용역업체를 동원해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새벽 네 시 반, 공단 전체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기습한 것이다. 이들은 자기 뜻대로 노조를 공장 밖으로 내몰지 못하자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공장 안에 있던 쇠로 만들어진 자동차 부품과 장비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퍽퍽 쓰러졌어요. 사람이 다쳐서 피 흘리며 살려달라고 하는데 경찰은 밖에서 빤히 보고도 멀뚱멀뚱 서있기만 했죠. 경찰은 연행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서있더라고요.”

‘7·27’이라 불리는 이 전쟁 같았던 밤은 여름휴가 이틀 전이었다. 그러나 휴가 기간에 공장을 정상가동하고 노조를 없애려던 회사의 계획은 실패했다. SJM지회는 여론-조직-생산을 모두 손에 쥐며 압도적인 승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용역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언론에 낱낱이 공개되고, 이를 묵인한 경찰과 고용노동부에게도 화살이 쏟아졌다. 국회 청문회에서는 쌍용자동차, SJM, KEC, 유성기업에게 노조 파괴의 책임을 추궁했다. 노조 파괴 기획 시나리오를 쓴 창초컨설팅과 이를 현장에서 지휘한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만행 역시 낱낱이 파헤쳐졌다. SJM의 노무관리 라인과 컨택터스 실제 운영자 등 핵심 관계자들이 구속됐다. 컨택터스는 사업 허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조 파괴 시나리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민주노조 진영은 환호했다. 경주부터 경기까지 전국을 휩쓸던 노조 파괴 도미노가 드디어 멈췄다. SJM의 투쟁은 그만큼 상징적인 싸움이었다. 
 
 

향우회는 막고 소모임은 지키고

우호적인 여론, 사회적 연대, 생산에 대한 주도권을 손에 쥔 SJM지회는 강력했다. 하지만 SJM지회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조합원들의 끈끈한 관계망이었다. 당연하지만 가장 어려운 그것,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결’ 말이다.

“이전에도 노조 파괴 시도는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조직이 힘이 있어야겠다, 그 뒤로 쭉 조직력을 강화해왔던 과정이 있어요. SJM지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먼저 특정한 정치적 이해를 바탕으로 끼리끼리 어울리지 않아요. 생각이 다를 순 있어도 노조 문제에 있어서는 한 목소리를 내죠.” 김영호 전 지회장은 철저하게 집행부 중심으로 활동하는 SJM지회의 기풍을 자랑했다.

“또 하나는 향우회가 없어요. 회사가 계속 향우회를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어요. 사실 향우회 때문에 깨진 노조가 꽤 돼요. 향우회까지는 아니어도 동네 모임으로 뭉치다보면 나중에는 위원장 선거도 그 모임에서 나오고 그래요. 그럼 그런 모임들을 회사는 또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거죠. 그런 노조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깨지는 거죠. 사측도 호남 출신 회사 관리자들을 앞세워 호남향우회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호남 출신 노조 간부들이 몸으로 막았죠. 발족식에 가서 좁은 회사 안에서 왜 이런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지 물었더니 도망가더라고요. 찔리는 게 있었던 거죠. 향우회 하나 없애는 과정도 사소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했어요.”

SJM지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층 조합원들을 장악하려는 사측의 시도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얘기지만 사실이었다.

“회사는 체육 소모임도 만들었어요. 구사대처럼 이용하려는 거죠. 처음에는 축구부를 만들었어요. 지원비도 주고, 유니폼도 맞춰준다고 하면서요. 노조 간부들이 축구부에도 들어가 장악했죠. 그랬더니 야구부를 만들더라고요. 호응이 없으니까 탁구부, 족구, 마라톤 동호회까지 만들었어요. 마라톤 동호회에는 사장부터 인사노무관리 담당자들이 쭉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회사 관리자들이 술자리도 만들고, 사장부터 속해있는 최대 조직이 됐죠. (웃음) 그래서 또 우린 팔자에도 없는 달리기를 하면서 마라톤 동호회를 ‘민주화’하는 과정이 있었죠. 소모임 하나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결국 지회는 공장 내 모든 체육소모임을 장악했다. 회사가 의도적으로 노무관리에 활용하려는 시도를 지속했지만, 7·27 이후엔 관리자들은 죄다 내보냈다.

이렇게 꾸준히 조직력을 강화한 과정은 2012년 투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직장폐쇄 투쟁 때 마라톤 동호회 회장이 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절대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했어요. 문자도 수시로 넣고요. 지회장이 해야 할 역할을 마라톤 회장이 하니까 또 새로운 거에요. 족구 소모임도 안산시 족구대회를 SJM 돕기 족구대회로 개최해 홍보도 하고, 후원금 200만 원도 받고 그랬어요. 안산 마라톤 대회에도 모두 7·27 당일 사진으로 등벽보를 하고 뛰었어요. 입구에서 홍보하고 서명도 받았죠.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이 조합원들이 버티게 하는 힘이거든요.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라, 매일 매일을 이렇게 버틴 거에요.” 조합원들을 엮어주는 끈끈한 관계가 있었기에 SJM지회는 승리할 수 있었다.

복수노조법 개정 이후 많은 현장에서 복수노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순한 노사 갈등에서 노동자 간의 갈등으로 구도가 변한 것이다. 회사는 직접 나서지 않고도 어용노조를 통해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킨다. SJM지회가 현장에서 조직력을 강화해 온 사례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왜 노동운동이 이렇게 비참한가”

7·27 사건 이후 김영호 전 지회장은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7·27 이후에 많이 반성했죠. 나름대로 87년부터 열심히 살았다고 했는데, 걸음마도 못 떼던 노조를 한국 노동운동의 일정 부분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시켰죠. 그러면 전보다 더 좋아지거나 보람이 있어야 되는데 아니었어요. 왜 지금 우리 노동운동의 결말이 이렇게 비참한가 고민을 하게 된 거죠. 나름대로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왔는데 욕을 먹는 위치가 된 거에요. 지금까지 했던 노동운동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2016년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조합원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한국 사회에서 노조의 발전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노조가 주변에서부터 지지받고 영향력을 가진 사회집단으로 발전해야 한다’라는 대답이 1282명으로 가장 많았다.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노동조합 운동이 스스로의 이익 추구에만 갇히고 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있어왔다. 김영호 전 지회장도 이 부분에 아쉬움을 표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산별의 거대한 힘을 다른 방향에 썼다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거죠. 노동운동만 잘 돼서 노동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노동운동도 사회운동의 일부분이잖아요. 사회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사회 문제에 너무 어두웠어요. 우리는 단결 투쟁만 열심히 하면 잘 한다 소리 들었고, 그 힘만 있으면 사회도 변혁 될 거라 믿었거든요. 점점 전체 사회에서 특수하고 이질적인 집단이 된 거죠. 이제 개별 자본만 가지고 싸웠던 시대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상대로 진짜 우리의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햇볕발전협동조합부터 세월호까지

경기지부 설문조사에서 ‘노조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높이기 위해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사회적 인식을 바꿀 혁신적 실천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답이 55퍼센트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김영호 전 지회장 역시 이런 끊임없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봤다. “다양한 시도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해요. 오랜 기간 축적되는 정치적, 사회적 힘을 만들어가는 과정인거죠. 그래야 조직 확대도 가능하다고 봐요.”
 
 
최근 SJM지회는 활발한 사회연대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게는 지역사회부터 실천하고, 크게는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투쟁에 함께하고자 했다. 먼저 7·27 이후 받았던 밀린 임금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했다. SJM지회는 2억에 달하는 기금을 마련해 안산시민햇볕발전협동조합에 출자했다. 지역사회와 꾸준한 관계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앞으로는 노조가 고립될 것이라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물론 조합원들의 반발은 있었지만 설득 끝에 조합원 200여 명 이상이 공동으로 출자했다. 만들어진 발전소를 가동해 나오는 배당금을 모아 지역사회기금과 지역 활동 거점을 마련할 계획이다. 현재는 안산지역 노동안전센터 설립을 준비 중이다. 그동안의 노동조합 활동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다. 

2014~15년 민주노총 안산시지부 의장을 자진해서 맡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우리 사업장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함께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내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했어요. 뭐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죠. 워낙 실력이 미약하고 밑천이 없다보니까 생각대로 잘 안 되더라고요.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니까 힘들기도 했고, 무기력감도 커지기도 했어요. 나중에는 노동조합이 제 역할을 더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힘을 키워서 진상을 감추려 했던 박근혜 정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세월호 문제는 풀린다고 봐요.”

참사 이후 SJM지회는 안산지역의 노조들과 함께 세월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월호 투쟁을 통해 단순히 투쟁 동력을 동원하고, 기금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나서 사회운동을 견인하는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그런 힘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봤어요. 노동조합부터 건강하게,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 나가고 지역사회운동에 적극 연대하는 것이 필요해요.”
 

표정 있는 노동운동을 위해

김영호 전 지회장은 과거 투쟁 방식은 조합원들이 쪽수만 채우면 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파업 이탈 안 하고 내 자리만 지켜주면 사회도 바꿀 수 있다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 얼굴 없는 쪽수 채우기로는 안 돼요. 집행부만 사회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 한 명 조합원들이 지역주민으로, 부모로서 자기 목소리를 자기 삶의 공간에서 낼 수 있어야 돼요. 조합원이 자신의 잠재된 역량을 발휘하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해요. 예전엔 아파트 동대표 같은 걸 하면 개인적 일로 여겼어요. 다들 봉사활동도 많이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노동조합과 연결되지 않았죠. 하지만 쪽수 채우는 역할만 주어졌을 땐 드러나지 않던 조합원들의 창조적 역량들이 다양하게 발휘되는 것,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믿을 만한 희망이에요. 이렇게 역량을 쌓아간다면 10년 뒤 민주노조 운동의 기반은 굉장히 달라질 거라고 봐요.” 

개개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 없는 노동운동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이 겹쳐지며 만개하는 새로운 노동운동. 이를 상상하며 전진하는 SJM지회의 도전은 소중하다. 무너지고 있는 현장의 관계를 다시 다지고, 사회와 만나려는 다양한 시도를 앞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의 승리는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실패를 반추하고, 꾸준히 준비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만든 경험들이 하나둘씩 쌓인다면, 앞으로 펼쳐진 노동운동의 길도 그리 어둡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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