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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6/04 제15호

재벌이 망친 한국 경제, 무엇을•어떻게•왜?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분배 정의에서 경쟁력 강화로?

얼마 전 <보수와 진보, 함께 개혁을 찾는다>라는 토론회에서 양측 모두가 대기업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재벌개혁 진영이 지금까지 구조조정보다는 재벌이 독식한 부의 재분배 문제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이전과 많이 달라진 주장이다. 4년 전 총·대선에서 새누리당까지 재벌 규제와 재분배를 핵심 의제로 제시했던 것과도 적잖이 다른 분위기다. 

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위기 영향 탓이다. 대표적 재벌개혁론자인 김상조 교수는 “재벌이 성장은커녕 생존도 불투명한 상황이 되면서 … 임금을 올리고, 세금을 더 내라고 요구하는 정책도 유효하지 않다. … 스스로 구조조정을 하고 사업 기회를 찾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줘야 한다”(한겨레 2016.1.8.)고 주장했다.

이런 구조조정 요구는 세계경제 침체로 대기업도 사업 변화가 필요한데 재벌 총수가 자기 이익을 위해 구조조정을 주저한다는 진단이 배경이다. 재벌 총수들은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탓에 얽히고설킨 지분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화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또 대마불사 정신으로 버티면 어떻게든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한국 경제를 위해 구조조정 친화적 기업 구조와 시장 제도를 만드는 것이 재벌 개혁의 요체라는 것이 김상조 교수의 주장이다. 
 

뒤바뀐 원인과 결과

기업 구조조정의 핵심 근거는, 시장에서 퇴출당해야 할 한계기업이 부당한 금융 지원으로 유지되면 국민경제의 자원(금융과 노동력)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부실기업 자산비중을 10퍼센트 포인트 낮추면 일자리 11만 개가 만들어진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최근 자본주의의 문제는 자본 부족이 아니라 자본 과잉인 까닭이다. 

자본에 대한 수요·공급 상태를 보여주는 금리를 보면,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현재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다. 만약 한계기업 정리가 가장 중요한 게 사실이라면, 한계기업들이 자본시장을 부당하게 점유하고 있어 금리가 오르고, 정상기업들이 자금을 구하지 못해 흑자 도산하는 유동성 위기가 벌어져야 할 것이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오히려 은행들이 남아도는 돈을 가계에 무리하게 대출해 작년부터 부동산시장이 비정상적으로 과열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고용도 마찬가지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계기업이 노동력을 점유해 정상기업들이 노동력을 구하지 못하고, 노동시장 공급 부족으로 임금이 오르는 양상이 지배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10여 년간 임금정체와 고용불안이 문제가 되긴 했어도 노동력 부족이 이야기된 적은 없었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한국개발연구원 연구는 인과관계를 뒤집은 것이다. 산업 불황에 따라 고용과 투자가 줄고 한계기업이 늘어난 것이지, 한계기업이 늘어 고용과 투자가 줄고 불황에 빠진 것이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 가능한 건 이들이 자본주의의 무한한 성장을 전제한 채, 성장이 안 되는 이유를 외부의 교란에서 찾는 탓이다. 
 

자본주의의 기울어진 운동장

그렇다면 끝을 알 수 없는 경기침체와 중하위 재벌로까지 번지고 있는 경영 위기, 그 가운데 노동자 생존권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현 상태를 노동자들은 어떻게 타개할 수 있는가? 경제위기를 체제 자체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자.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완전 경쟁이 보장되는 공정한 시장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왜냐면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으로 생산성 발전은 보다 많은 자본설비를 도입해서 이뤄지는데, 생산성이 발전할수록 더 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기업만이 경쟁 가능하고, 결국 자본 집적에 성공한 소수만이 경쟁에서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가 활발해지는 호황기에는 신규 자본 유치를 싹쓸이하는 소수가, 새로운 투자가 얼어붙는 불황기에는 경쟁자나 경쟁에서 뒤쳐진 기업을 인수합병하며 덩치를 키우는 소수가 경제력을 집중시킨다. 

2014년 미국 200대 기업의 GDP 비중은 42퍼센트에 이른다. 유럽연합 28개국의 대기업(종사자 250명 이상) GDP 비중도 42퍼센트다. 복지국가로 유명한 북유럽 국가들은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더 크다. 한국의 30대 재벌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퍼센트 정도며, 대기업(종사자 300명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50퍼센트에 이른다.

즉, 소수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은 한국만이 아니라 선진국 자본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 소수의 대기업이 주도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경쟁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재벌은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선진국 대기업과 차이점도 있다. 유럽과 미국은 17세기부터 몸집을 거대하게 키운 금융자본이 기술혁신에 성공한 산업자본의 성장에 함께했다. 하지만 거대 금융이 없었던 한국은 국가가 직접 자본을 동원해 대기업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문어발식 확장으로 수익을 바랬던 기업주들의 의도와 통치자금을 확보하려던 군부정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소수 지분을 가지고도 계열사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이 만들어졌다. 소수 지분밖에 없었던 재벌 총수들은 경영권을 통해 기업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불황기에 나타나는 과잉축적

마르크스는 이런 대기업이 가지는 특성으로 ‘과잉축적’을 지적했다. 시장의 경제력을 집중시킨 대기업의 특성은 호황기보다 불황기에 잘 나타나는데, 이들은 이윤율이 하락하는 위기 시기에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 증대로 상쇄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투자를 단행하기 때문이다. 이는 금융과 결합해 많은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대기업만이 가능하다.
 
미국은 19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일본은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은 199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는 과잉축적 시기였다. 이 시기 세 국가는 이윤율이 하락하며 호황이 끝나고 불황의 조짐이 보였지만, 오히려 시설투자가 늘어 이전보다 고정자본 증가율이 더 컸다. 달러라는 세계화폐를 보유한 미국은 과잉축적과 함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단행해 과잉자본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었지만, 일본과 한국은 달랐다. 일본은 부동산 버블 붕괴를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불황을 지금까지 겪고 있고, 한국은 국가가 부도 나며 IMF 감독하에 폭력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편, 총수 일가가 소수 지분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한국 재벌의 특수성은 나라경제가 붕괴한 후 더 확실하게 나타났다. 외환위기 당시 30대 재벌 중 절반 가까이가 도태됐는데, 살아남은 재벌들이 이들을 인수합병하며 오히려 규모를 키우고, 더 적은 지분율로 그룹을 지배하기 위해 예전보다 재벌 총수의 경영권을 강화한 것이다. 

정부 돈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로 수익률을 높인 재벌들은 인수·합병과 해외 진출을 확대했다. 최근 많이 알려진 재벌의 높은 사내유보율은 지분이 아니라 회삿돈을 관리하는 경영권을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재벌의 특성 때문이다.

이런 특성 탓에 재벌들은 위기 이후 더 과감하게 투자했다. 특히 2007~12년 세계금융위기 전후 수출제조업 재벌들은 유례없이 투자를 확대했다. 제조업 대기업의 유형자산은 이 기간 두 배나 늘었다. 선진국 경쟁 기업이 재무위기에 빠진 사이 공격적 투자에 나선 것이다. 제조업 수출 재벌들이 2010~13년 최고 수익을 올려 이런 투자가 성공한 것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2014년부터 신흥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조선, 철강, 전자, 화학 등 다수 재벌 계열사들이 수익률 격감과 재무위기에 처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위기의 막장은 위기에 처한 자본들이 서로 손실을 떠넘기는 경쟁을 하며, 과잉축적된 자본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공황 이후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과잉 자본과 노동력을 포화 속에 없애버리며 자본주의를 재생시킨 것이 극단적 예다. 큰 기술혁신을 통해 기존 자본의 가치를 줄이고, 새로운 기술로 자본축적을 재개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주도 세계자본주의도 그렇고, 당연히 혁신보단 기업규모 확대에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 재벌도 그렇다.
 
 

체제에 도전하는 노동자운동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는 세계경제가 호황으로 나갈 가능성이 없는 가운데 재벌의 과잉축적을 처리할 뾰족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재벌 계열사 중 한계기업을 구조조정해 자본과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자는 분석은 현 사태의 원인을 반대로 짚은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전망은 공황과 전쟁을 통한 끔찍한 물리적 파괴나 기술혁신을 통한 자본 가치의 파괴인데, 현재까지는 후자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단결할 길을 찾아야 한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그나마 아직 곳간이 차있는 재벌에게 생존권을 요구할 수 있도록 투쟁과 교섭 체계를 기업별이 아닌 산업적, 전국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말만 번지르르한 재벌개혁론이나 산업육성정책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 중요한 건 노동자가 각자도생이라는 바닥을 향한 경주로 나가지 않고, 단결된 모습으로 체제에 도전하는 여러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노동자운동은 재벌에 대한 사회화 전략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노동자가 직접 재벌을 경영하고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실력과 조직을 어떻게 갖출 것인가가 관건이다. 재벌 총수의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이나 또는 정부 관료가 대신하는 건 위기의 형태만 변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유로워지려면 생산자 스스로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지적, 물적 요소를 집합적 형태로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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