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 2016/03 제14호
일상에서 페미니즘 고전 읽기
<빨래하는 페미니즘>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여자들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로 간주해야 할까?”
책 중간에 저자가 가볍게 던진 질문이지만, 책을 덮고도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 ‘여전히’, ‘페미니스트’라는 대목마다 생각이 걸린다. 페미니스트가 무슨 벼슬이라고 어머니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인정을 받네 마네 할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 질문을 던지고, 또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출산, 양육을 둘러싸고 여성이 겪는 딜레마 때문이다.
페미니즘에서 답을 구하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은 1990년대 초반 미국의 바너드 여자대학을 다니며 페미니즘을 접했다. 그녀는 68혁명 이후 활발하게 타올랐던 2세대 페미니즘의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권의 외침에 대해 자극받고 열광했던 젊은 여성이었다. 5년간 동거한 남자친구와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결혼을 앞당겼고, 그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후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에게도 혼란이 찾아왔다. 필사적으로 울며 매달리는 아이가 아직 낯설고, 그런 아이를 품속에서 곤히 재울 수 있는 능력도 부족했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녀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샘솟지만 자아를 잃어가는 것만 같고, 나를 잘 이해해주고 평등하다 생각했던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만이 생기자 걷잡을 수 없는 상념의 나락으로 빠졌을 게다. 페미니즘에 열광했고 원하는 직업을 택해 능력을 발휘하며 살았던 그녀에겐 매우 가혹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을 환기시킨 것은 서점에서 딸아이에게 동화책을 쥐어주고 뽑아든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였다. 자기계발서, 가정생활, 육아 코너의 책들도, 주변의 또래 엄마들이나 남편과 친구들도 답을 주지 못했던 마음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열쇠를 그녀는 페미니즘에게서 찾기로 결심했다. 그리곤 주저 없이 바너드 대학의 ‘페미니즘 고전 강의’를 듣는 30대 청강생이 되었다.
그 옛날 페미니즘이 반가운 이유
이 책은 ‘페미니즘 고전 강의’에서 수강한 내용을 기반으로 26권의 고전을 통해 여성의 삶, 특히 어머니가 된 여성이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들여다본다. 페미니즘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익숙할 이름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부터 처음 들어본 이름들까지. 고전이라 하여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각 고전의 저자나 책의 내용에 대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비판적 입장이 있다면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보는 편이 낫다.
스테퍼니는 고전을 쉽게 읽어주는 여자처럼 아주 편하게 책 속의 핵심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자 스스로 교수나 박사학위 과정의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코웃음 칠거라 말하듯이 분석과 비평이 목적인 책이 아니다. 그저 오늘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페미니즘 고전이 반갑게 만나 에너지와 위안을 줄 뿐이다.
보부아르를 통해 읽는 결혼과 출산
페미니즘의 고전들이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명쾌한 문장으로 와 닿는 것은 왜 일까? 저자가 소개하는 고전과 여성의 삶이 만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대한 안내를 보자.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결혼, 출산, 양육의 길을 가고 있는 저자는, 자유롭지만 고독한 삶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매력을 느낀다. 보부아르와 같이 도전적이고 매혹적인 삶을 꿈꿨지만 결혼과 출산을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유약한 신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통해 여자가 부수적 존재로 자리하고 있음을 강인하고 예민한 필체로 그려낸다. 그녀는 ‘남자의 인생은 명성이며, 여자의 인생은 사랑’이라는 식의 통념을 비판한다.
“여자들이 자신의 강인함을 사랑하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지는 날, 그날 비로소 사랑은 남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여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이 아닌 삶의 근원이 될 것이다.”
저자는 이해를 돕고 흥미를 돋우기 위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결혼과 아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지적이고 열정적인 관계를 맺었는지 소개하기도 한다.
한편, 이 책은 고전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한 언어로 정리한다. 저자는 보부아르가 출산이 여성의 자아를 속박하고 선택적 의무라고 설명한데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들은 결혼 이후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정의 내릴지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고. 그러면서 ‘출산과 육아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변화시킨다’는 자기 경험을 독자와 나눈다.
자아를 찾아가는 엄마들을 위한 작은 안내서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제목과 표지만 봐서는 알 수 없는 흥미로움이 담겨있다. 물론 한 개인의 경험에 따라 쭉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라 다양한 처지에 있는 여성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다. 여성의 현실을 제약하는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담기지 않았다.
이를 감안하고 본다면 어머니로서 자신의 삶과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작은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각각의 페미니즘 조류들이 달성한 성과와 문제의식, 그리고 그 한계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기회가 된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 읽어도 좋을 법하다.
“페미니즘의 의도가 여자들의 경험이라는 옷감을 짜는 것이라면, 인생의 가장 다채로운 실이랄 수 있는 사랑과 낭만과 육아의 기쁨을 어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처음의 질문에 답하자면, 당연히 어머니가 되고픈 여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사랑, 결혼, 출산, 양육과 같은 일련의 과정이 여성의 삶을 옥죄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모든 페미니스트가 주목해야 하는 과제일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