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6/03 제14호

자유주의 정치, 실패의 계보

  • 이상욱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조직국장
박근혜 정권 폭주의 다른 면에는 무능한 야권이 존재한다. 흔히 민주당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왜 이명박, 박근혜에 반사이익을 누리는 것 외에 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이들이 정권을 잡은 10년과 그 후의 행보를 되짚으며 이들이 왜 무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살펴보자.
 

‘민주’ 정권의 신자유주의

외환위기 여당 책임론을 내세운 김대중 후보는 수구세력 김종필과 연합하여 199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그는 후보 시절 이미 IMF 프로그램 이행 보장 각서에 서명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거 받아들였다. 당선 후에는 긴축적 통화·재정 정책, 외국인 투자 자유화, 수입 자유화, 금융개혁, 기업지배구조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뿐 아니라 IMF가 요구한 것보다 더욱 강력한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IMF 플러스’)를 스스로 약속했다. 부실기업을 헐값에 매각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자본의 손실을 덜어주었다. 한편,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합고 노사정위원회를 활용해 노동유연화 조치인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근로제를 도입했다.

이처럼 김대중의 집권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는 기점이었다. 이때부터 수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나아가 ‘민주화 세력’은 고통분담과 국난 극복을 주장하며 노동자·민중을 희생시켰다. 김대중 정권 동안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은 심화되었고, 비정규직 문제가 크게 부상했다.
 

정치개혁 노선의 실패

2002년 대선후보로 깜짝 등장한 노무현은 ‘대등한 한미관계’, ‘상식이 통하는 세상’, ‘참여와 인권’을 강조하는 변화의 아이콘이었다. 노무현의 제1의 목표는 정치개혁이었다. 기존 정당과 정치인을 낡은 것으로 비판하고, 정당과 선거구제, 정치자금 등 정치개혁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안정적인 지지 기반이 없었던 그는 노사모와 미디어에 의존했다. 

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노무현은 386세대와 시민단체를 흡수하여 지지 세력을 구축하려고 했다. 또 국보법폐지, 과거사진상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개혁법을 4대 개혁입법으로 선정하고 이를 이슈화시켰다.

하지만 2003년 집권 직후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면서 노무현에 대한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건 이전 정권들과 달라지지 않았다. 

탄핵 정국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한 노무현은 평택미군기지 확장, 비정규악법, 노사관계로드맵, 한·미FTA 등을 추진해, 진보세력의 큰 반발을 불렀다. 그는 정치 개혁을 통해 한국 사회를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결국은 미국 패권과 신자유주의에 순응했다. 정치 개혁으로 시장을 뒤바꾸려는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의 실패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이탈을 확산시켰다. 정권 말기 노무현은 지지율 5퍼센트라는 낙제 성적표를 받는다. 

결국 ‘민주화 세력’의 집권 10년은 신자유주의를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으며,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를 악화시켰다. 뭔가 다른 정치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감만을 맛보았다.
 
 

반MB를 통한 집결

이명박 정권에서 야당은 광우병 촛불시위와 노무현 자살을 겪으며 다시 부상했다. 야당은 이명박을 범죄자나 독재자에 비유하며 그에 대한 혐오 정서에 편승하고, ‘민주 대 독재’ 프레임으로 정권에 대응했다. 김대중·노무현의 유훈 통치에 기대어 자신들의 과오를 덮고, 다시 한 번 자신을 민주 세력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2010년 3월에 발표한 《뉴민주당 플랜: 국민과의 약속》은 이명박 정권에 맞선 민주당의 종합 계획을 담았다. 친재벌·친기업 정부를 겨냥하여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발전모델의 핵심전략은 ‘포용적 성장’과 ‘기회의 복지’였다. 

포용적 성장은 인적 자원과 중소기업을 중시하고, 지식산업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일자리를 늘리고 빈부격차를 완화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복지는 민간부문의 성장과 교육투자를 통해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여 기회의 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의 지상 과제로 따뜻한 공동체, 중소기업 강국,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내걸기도 했다. 

또한 민주당은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찬반 논쟁을 일으키며 승리했다. 심지어 10월 대의원대회에서는 ‘중도개혁주의’ 노선을 삭제하고 ‘중산층-서민’의 정당, ‘보편적 복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뉴민주당 플랜과 보편적 복지, 무상시리즈를 두고 민주당의 ‘좌선회’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러나 경제 정책의 전면적 전환이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보완 정책인 ‘한국형 유연안정성 모델’에 머물렀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근간은 유지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에 대해서 정책 조정과 조합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결코 신자유주의 노선의 전환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민주당은 이후 MB 심판론을 전면에 내걸고,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는 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보육·반값 등록금(무상복지 3+1)을 당론으로 결정했다. 자신들이 집권한 10년간 심화시킨 양극화·소득불평등을 남 탓으로 돌리고, 이명박의 실정을 집중 공격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꽤 성공을 거두어 진보정당과의 반MB연합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반영하면서 중도보수화로 쇄신하여 이명박 정부와 거리두기에 성공한 박근혜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결과 총선은 새누리당 과반 의석으로 끝났다.
 

정치 이벤트의 반복

심화된 양극화와 불평등에 따른 대중의 불만은 2012년 대선주자들의 공약에 반영되었다. 문재인과 박근혜는 앞 다투어 경제민주화와 복지 정책을 선보였다. 새누리당이 복지 정책에 고용과 주거까지 포함하자, 문재인은 이를 추가해 ‘보편적 복지3+3’으로 공약을 바꾸는 식이었다. 그리고 야권은 대선 패배 후에도 이념적·정책적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채 과거를 답습하고 있다.

대선 이후 당직 일선에서 물러난 문재인과 친노 세력을 대신해 김한길이 당을 재정비하고자 했다. 핵심은 안철수를 영입하는 것이었다. ‘안철수 현상’을 등에 업고 야권을 키우겠다는 목표에 따라, 합당을 통해 ‘새정치민주연합’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정치 혁신에 대한 입장 번복과 여당에 대한 공세에 열을 올리다가, 당권을 두고 계파 갈등을 반복했다. 정작 민생과 직결된 철도·의료민영화 시도, 세월호 참사, 노동개악 추진 등 주요 이슈에 대해서는 무기력했다.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갈라졌고, 총선을 겨냥해 중도층 흡수를 위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 야당은 외부 인사 영입이나 당명 개정 같은 이벤트 없이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더민주당이 박근혜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인 김종인을 영입한 것은 중도 경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민주당에 입당한 김현종

하지만 김종인이 발표한 ‘더불어성장론’에서 드러나듯 근본적인 ‘민생해법’은 찾을 수가 없다. 몇 가지 정책에서 차이를 부각시키려 하지만, 중도층과 부동층을 흡수를 중시하기 때문에 여·야간의 정책 수렴은 계속되고 있다. 
 

구조적 무능, 벗어나지 못하다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념적 한계, 상대방을 탓하며 낡은 ‘민주·개혁’ 프레임에 갇힌 정치, 정권 교체의 대안은 자신들뿐이라며 지지를 강요하는 모습. 오늘날 야권이 보여주는 행태들이다. 스스로 씨를 뿌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오늘날의 헬조선이 만들어졌는데도 이명박과 박근혜에 대한 원망만 일삼는 것이 야당의 현주소이다. 

야당이 근본적인 변화 없이 말로만 ‘민생해결사’를 자처하는 한 대중의 외면은 지속될 것이다. 야권의 실패는 홍보전문가, 또는 어떤 인재를 영입한다고 해서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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