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6/02 제13호

누가 손실을 부담할 것인가?

수출재벌 위기로 시작된 한국경제의 분기점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올해부터 몇 년간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전개방향이 결정되는 정치·경제적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출재벌 중심 경제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사회 제도가 한계에 부딪혔다. 앞으로 어떤 정치세력이 어떤 전망을 가지고 한국 사회를 이끌 수 있을지가 첨예한 쟁점이 될 것이다. 

향후 2년간은 총·대선을 매개로 한국 경제의 발전전망을 둘러싼 논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새누리당의 장기집권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반대로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범야권은 위기로 내몰리고 있어, 야권 정치세력 간의 투쟁 역시 격렬하게 진행될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는 이 분기점에서 사회운동이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을 통해 대안적 정치세력으로 나갈 수 있을 지가 관건이다. 구조조정 투쟁에서 산발적 개별적 투쟁으로 파편화되고, 두 번의 전국선거에서 독자적 정치세력이 아니라 야권의 투표 동원 대상으로만 남게 된다면, 외환위기 직후처럼 재벌의 손실전가에 속수무책 당할 가능성이 크다.
 

지연된 위기 

한국 자본주의는 외환위기 이후 2013년까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금융세계화 효과가 나타났다. 하나는 수출재벌의 성장이다. 재벌들은 2000년대 자산 시장 성장을 배경으로 한 세계적 소비 증가 덕분에 수출 호황을 누릴 수 있었고, 공적자금으로 부채와 중복투자 부담을 덜어내고 노동시장유연화로 비용절감까지 이뤄 높은 수익률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가계부채 증가다. 소득 상위층은 금융화가 가져온 자산시장 활성화를 이용해 가계 자산을 늘리기 위한 담보대출을 증가시켰고, 소득 하위층은 소득 정체에 생존을 위한 생계비 대출을 증가시켰다. 

그런데 2007~10년 세계금융위기로 금융세계화가 무너졌다. 한국은 여러 특수한 이유로 미국, 유럽과 달리 그 효과가 2013년 이후 오히려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수출 재벌의 침체와 구조조정

2014년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수출재벌들의 침체와 구조조정은 올해와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지난호 〈구조조정을 더 쉽게 만들겠다고?〉 참고). 

한편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정부 정책은 최근 수출 감소가 기업 경쟁력이 아니라 세계적 소비 감소 문제란 점에서 주소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특히 일시적 호황을 장기 호황으로 착각하고 저질러 놓은 2010~13년 투자가 문제인데, 이는 정부가 생각하는 정도의 미시적 인수합병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난 4년간 30대 재벌 자산이 두 배가 늘었다. 그리고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2000년대 부흥했던 러시아나 브라질 등의 신흥국가들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가망도 없고, 본격적 성장률 둔화에 진입한 중국이 다시 대대적 경기부양에 나설 가능성도 없다. 세계경제가 이 정도로 수축 중인데, 수출기업들의 비용경쟁력을 조금 높여준다고 과잉축적으로 인한 손실을 메꿔줄 순 없다.

이 과정에서 법제화 없이 정부 가이드라인만으로 이미 도입되고 있는 일반해고와 정부가 앞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겠다는 경영권에 대한 쟁의 제한 방침은 실질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업활력촉진법이 도입된다면 이후 운영 방법에 따라 재벌들이 손실을 기업 쪼개기로 최소화할 수 있는 수단을 쥐어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극단적 상황에서도 재벌들은 인력구조조정과 기업 쪼개기로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계부채라는 뇌관 문제

가처분 소득대비 비율이나 증가율에서 OECD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인 한국의 가계부채 문제는 미국 금리 인상 효과와 최근 몇 년간의 부동산 시장 거품이 빠지는 시기가 될 올해 핵심 문제가 될 것이다. 

한국은 2007~10년 세계금융위기 동안 부동산 시장과 가계부채가 조정되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수출재벌 호황 효과와 정부의 적극적 부동산 정책 탓이다. 상위 소득층은 정부 부동산 부양책에 대한 믿음으로, 하위 소득층은 그야말로 살기가 더 어려워져 부채를 늘렸다. 

하지만 미국 금리 인상으로 인한 전반적 금리 인상 압박이 강해진 가운데 재벌들의 구조조정으로 중상위층 가계가 소득 압박을 받고 있어, 부동산 부양정책 효과가 곧 사라질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전망이다. 저소득층 생존권 위기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사업자금과 생계비로 많은 대출을 가져다 쓴 저소득 자영업자의 위기가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거시경제 차원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정도로 가계부채 문제를 관리하면 된다고 여기고 있다. 총가계부채의 75퍼센트는 소득 상위 40퍼센트가 가지고 있는 부채로, 상당 부분은 자산형성을 위해 투자한 것이라 당장 문제가 될 여지가 적다. 정부는 이걸 관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총가계부채의 25퍼센트에 불과한 소득 하위 60퍼센트의 부채는 대부분이 자영업자 사업자금이나 저소득자 생계비 대출로, 이들의 생존권이 걸려있다. 금리 인상으로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이 늘거나, 경기침체로 더 큰 부채가 필요할 경우 서민 경제 파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긴축적 부채 관리

정부는 이와 별도로 소비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경기 부양책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재정정책은 확장적 재정정책과는 규모에서나 성격에서나 거리가 멀다. 정부가 밝히고 있는 2016년도 재정계획은 공기업 중심으로 SOC투자를 6조 원 정도를 늘리겠다는 게 전부로 나머지 거시정책은 대부분 민자유치나 민간부분 규제완화와 관련된 것이다. 

정부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기조인 엄격한 공공 부채관리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공공기관 정상화와 공무원연금 개혁이 대표적 사례다. 어쨌거나 공공기관 부채증가 속도를 크게 낮춘 것을 비롯해 일반정부 부채 증가 속도 역시 이명박 정권 시절의 절반 정도로 낮춘 상태다. 세계경제 침체와 국내소비 감소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지만 정부는 선진국 같은 확장 정책보다는 공급 측 구조개혁에 주로 신경을 쓴다는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긴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박근혜 정부의 재정정책은 철저히 수출재벌 편향적인 것이다. 수요 대부분이 해외에 있는 수출재벌들에게는 내수를 위한 정부부채 증가보단 원화 가치를 안정화할 엄격한 긴축이 더 유리하다.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는 GDP 대비 70퍼센트(800조 원) 정도고, 공공부문 부채(일반정부 부채+공공기관 부채 400조원)를 더하면 100퍼센트 정도다. 유로존 국가들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지만, 기축통화가 아닌 통화를 사용하는 나라들만 놓고 본다면 결코 낮다고도 할 수 없다. 재벌과 부자들에 대한 재분배 정책이 동반되지 않으면, 확장적 재정정책을 긴급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게 현 정부의 딜레마다.
 

현실에서 무능한 민주당식 대안

경제민주화나 소득주도성장이란 이름으로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과 차별화를 하려는 민주당 정책은 말만 번지르르 할 뿐 힘이 없다. 워낙 당이 좌충우돌해 진정성 자체가 의심되는 상황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내수, 중소기업 육성, 재벌에 대한 시장적 규제 등을 통해 해외수요(수출)를 대신하겠다는 이 구상은 한국 경제의 주축인 중화학공업의 과잉축적 된 자본을 처리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적자 생산이라도 해야 물량이 있는 조선소들, 창고에 가득 찬 철강제품들, 생산할 상품이 없는 기계제작소들, 놀고 있는 건설기계들, 수익이 나지 않는 석유상품, 중국과 시장점유율 경쟁을 하며 과잉생산을 더 확대하고 있는 IT제품들 등은 내수나 중소기업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과잉축적된 수출 중화학공업을 도태되도록 내버리고 내수산업 육성으로 고용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30대 재벌 대부분이 중화학공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데 이들이 부실화되면 이들과 물려 있는 금융 부문까지도 부실화된다. 더군다나 한국의 원화에 대한 국제 평가는 수출재벌 신용도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또한 내수산업이라 부르는 대부분이 이윤율이 낮아 고수익을 내던 수출 중화학공업 투자를 대체하고 심지어 성장까지 한다는 게 이윤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시장의 원리로는 불가능하다. 

경제민주화나 소득주도성장론은 도덕적 정당성이 있지만, 이것으로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재 한국 경제가 처한 문제들은 오직 이윤을 위해 투자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 없이는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
 
국내 1위 재벌 삼성 자본에 맞선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수리기사들의 투쟁
 

각자도생이 아닌 더 큰 단결로

재벌발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로 민생문제가 더욱 심각해졌지만, 조직된 투쟁은 민주노조 외에는 현재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황기 노동자 투쟁은 오히려 더 개별화되는 경우가 많다. 집단적 대안을 위한 투쟁은 성과가 모호한데 반해 기업별 노조가 사업장 내 양보교섭을 통해 얻게 될 실리는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운동은 기업을 넘어 산별로, 또 산별을 넘어 민주노총으로 단결해 생존권을 방어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모아내야 한다. 또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들을 정치적으로 이슈화하는 민중적·정치적 연대를 올해부터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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