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6/02 제13호
야만적 세계의 원죄를 묻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
<레버넌트>는 1820년대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유명한 모피사냥꾼이었던 휴 글래스를 모델로 한 영화다. 모피 산업은 금광과 석유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 미국의 중요 무역 자원 중 하나였고, 많은 사냥꾼들이 가죽을 얻기 위해 미개척지인 서부 지역으로 사냥을 가서 원주민들을 약탈했다. 서부 개척시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과 이주민에 대해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는데 <레버넌트>는 어떤 야심을 갖고 있을까?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영화의 제목인 ‘revenant'는 ’되풀이해서 돌아오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미 죽었지만 다시 돌아오는 망령’이란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레버넌트>엔 망령처럼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글래스는 죽은 아내의 목소리나 모습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실제로 그녀의 망령을 보기도 한다. 글래스와 대립각을 세우는 피츠제럴드는 적에게 공격을 당하는 와중에도 손질해놓은 가죽을 챙기는 인물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건 서슴지 않는다. 리족의 부족장 또한 납치당한 딸을 찾기 위해 전투를 이어가며 부족민들을 희생시킨다. 이들은 자신이 사로잡힌 것 때문에 삶이 파괴돼가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역설적 인물들이다.
흥미롭게도 <레버넌트>에는 누군가를 찾는 장면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면 그 대상에겐 이미 일이 벌어진 후다. 피츠제럴드가 대원 중 한 명인 콜트가 어디 갔냐고 물은 지 얼마 안 돼 콜트는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브리저가 계곡에서 물을 뜨고 돌아온 후 피츠제럴드에게 호크는 어디 있냐고 묻지만 그는 이미 피츠제럴드에게 살해당한 후다. 프랑스인들이 함께 있던 동료 투상이 어디 갔는지 찾는 동안 그는 자신이 강간한 여자에게 성기를 잘리고 있었다.
이미 상실한 것을 찾아 헤맨다는 것, 상실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찾는다는 것의 의미는 뭘까? 어쩌면 찾는다는 행위가 이미 상실했다는 것의 반증일지 모른다. 찾아 헤맨다는 건 내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예감과 함께 내가 한때 그것을 가졌었다는 기억 사이에서 지연된 시간 같은 거니까. 이는 영화의 주요한 서사적 테마인 복수와도 연결이 된다. 글래스는 아들을 죽인 피츠제럴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수한 고난들을 뚫고 결국 그와 대면한다. 복수의 칼날 앞에 선 피츠제럴드는 말한다. “그냥 복수나 하려고 이렇게 온 거야? 그럼 맘껏 즐기라고. 이런다고 죽은 네 아들이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복수라는 유구한 테마가 늘 마주하고 마는 딜레마를 <레버넌트>는 주저 없이 드러낸다.
그의 입김이 렌즈에 맺힐 때
글래스의 집념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다. 영화는 의도적이라 느껴질 만큼 글래스에게 감정이입할 요소를 주지 않는다. 복수극을 위해서라면 글래스와 아들의 관계를 더 드라마틱하게 강조했을텐데 글래스가 위기의 순간마다 되새기는 건 아들과의 기억이 아니라 죽은 아내가 남긴 시적 유언뿐이다. “폭풍이 몰아칠 때 당신이 나무 앞에 서 있으면 나뭇가지들이 떨어지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무의 몸통은 굳건하게 서 있죠.” 아들을 잃었다는 건 이야기의 개연성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 그를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건 오직 생존에 대한 본능이다.
글래스가 곰과 싸운 후 생사를 오고 갈 때, 아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꼼짝없이 목격해야 했을 때와 같은 위기의 순간마다 그의 시선에서 본 나무 쇼트가 등장한다. 울창한 나무들은 그를 내려다보며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소리내며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한 시대를 철저히 재현한 역사물인 동시에 자연의 경이로움에 도취된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두 측면을 모두 보인다. 역사성이 성실히 고증된 극영화인 것처럼 보이다가, 스크린에 인물들의 입김이 서리고, 피가 튀기고, 나무에 쌓여 있던 눈이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극화된 다큐멘터리와 다큐멘터리적인 극영화 어딘가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레버넌트>는 부성애나 복수, 더 나아가 북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이주민 문제를 다룰 때면 으레 나오곤 하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부각하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같은 시기를 그려낸 다른 역사물보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그래비티>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인간의 근원을 캐묻는 자연에 대한 경외, 우리가 멀어지게 된 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체험을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적 국가공동체가 지닌 일종의 원죄에 대해 캐묻고, 섬뜩한 성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이윤 앞에서 동료들의 목숨을 손 쉽게 버릴만큼 ‘야만적’이었던 백인 개척자(혹은 침략자) 자신의 원죄 말이다.
나아가 <레버넌트>는 19세기 미 개척민들의 원주민에 대한 학살의 역사를 낭만화하거나 은폐하려 들지도 않는다. 인디언 원주민을 원시적이고 순박하며 무력한 존재로만 다뤄왔던 비슷한 소재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그들을 ‘거래’도 하고 잔인한 전투에도 임하는 역동적이고 정치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원주민을 신비화하는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복수’는 누구의 몫인가?
이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주인공은 마지막 순간에 저 악랄한 상대를 죽이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박찬욱의 영화는 명징하고 기괴한 복수극이 된다. 반면 반전평화운동이 부흥한 미국의 1960~70년대 복수극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상대를 죽이지 않는 너그러움을 베풀고 끝난다. ‘너는 죽일 가치도 없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헌데 <레버넌트>는 그 복수를 신에게 맡긴다. 잔혹한 침략자들을 단죄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었을 게다. 이 점이 신선하긴 하지만,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인류 스스로의 성찰과 변혁이 아닌, ‘자연으로의 회귀’ 말이다.
<레버넌트>가 오늘날 주체로서의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고 냉소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하면 과도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으로의 회귀야말로 되풀이해서 돌아오는 망령이 아닐까. 어쩌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것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감각 말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