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 2016/02 제13호
위안부 협상의 이면에 놓인 미국의 전략
일본 재무장의 새로운 단계
12·28 위안부 협상은 피해당사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한 반인권적 담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은 이를 ‘외교적 성과’라거나, ‘망각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식으로 둔갑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이는 이번 협상에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부인 일본의 재무장 과정에서 미국의 압박이라는 외교적 이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SNS상에 떠도는 글귀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이번 협상의 배후에 미국의 압박이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위안부 협상 대응은 일본과 아베에 대한 징벌이나 복수의 관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사실상 북한의 핵무기 도발에 핵무장으로 맞서야 한다는 식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편적 인권과 평화권에 대한 인식과 싸움을 위해서는, 일본의 재무장과 우경화의 ‘원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이라는 맥락에서의 비판이 필요하다.
평화헌법 ‘강요론’의 빈약함 지적
사회운동 출판사에서 펴낸 <일본 재무장의 새로운 단계>는 이를 위한 매우 상세한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임필수는 사회진보연대 반전팀에서 군사문제와 평화운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 범국민대책위, 이라크파병 반대 국민행동,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대책위에 참여했으며, 현재 일본재무장반대 시민평화행동, 반전평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책은 크게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엔 미국의 태평양 군사전략과 팽창주의에 대한 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간적 구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대목으로 시작해, 현재 미국의 대중국 공해전 개념과 미일동맹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구상하고 있던 점령구상과 패전국 일본과 미국의 협상과 전후처리 과정에서 극동국제군사법정과 평화헌법이 생겨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특히 전쟁범죄에 대한 당시의 규정과 천황에 대한 면책과정, 이후 헌법이 생겨나는 과정까지의 전개과정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전쟁범죄에 대한 A, B, C의 분류는 단지 죄의 무게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닌데, 말 그대로 전쟁범죄의 세 가지, 평화에 반한 죄, 통상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를 기준으로 한다. 저자는 전쟁범죄가 이렇게 구성되어온 역사를 살핀다.
평화헌법으로 회자되는 일본의 헌법 원리에 있어선 우익들이 주장해온 ‘강요론’의 근거 빈약을 당시의 사료들을 통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냉전과 냉전 이후의 미일동맹
책은 냉전체제 하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추동해온 역사, 자위대의 창설과정과 함께 평화를 위한 전후 일본 사회운동과 1950~70년 사이의 일본의 평화운동 역시 상세히 다루고 있다. 현재 일본의 우익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개헌의 발판과 전후 짧은 시간 안에 일본이 재무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재무장과 헌법의 충돌 역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되는 문제다.
평화운동의 역사는 ‘일본의 대중운동사’와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과 국제 조직 ‘코민포름’, 그리고 일본 공산당의 당시 정세에 대한 인식과 반응은 일본 좌익운동이 전후정세에 대해 어떤 입장과 노선을 채택하는지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냉전 이후 현재까지를 다루는 3장에선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 속에서 일본의 위치를 역사적·정세적 이행과정을 설명한다. 또 일본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평화운동들을 소개하고, 어려운 현 정세에 대한 평가와 나름의 이행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무라야마 총리와 일본사회당은 어떻게, 왜 붕괴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평화운동의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평화헌법의 기반을 점진적으로 침식하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일본 사회당이었다. 93년 8월부터 4월까지, 94년 6월부터 96년 1월까지 연립정부에 참여하여 총리가 된 무라야마 총리가 그 원인을 제공했으며, 한국정부와의 갈등으로 한일정상회담이 취소되는 사태까지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본 평화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회당이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 보여준다.
역사와 정세를 통해 본 일본재무장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한 가지는 일본의 재무장이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전략의 일부라는 관점이다. 따라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부터 시작하여 미국 팽창의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 재편전략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평화운동’의 관점인데, 일본의 보수세력은 일본의 평화헌법이 강요되었으며 일본의 국민들은 피해자라고 인식하는데, 이 책은 평화헌법이 종전이후 평화주의 관점에서 변화하며 지속되어온 싸움의 결과물이라 주장한다. 일본 문제를 다룰 때 빠지기 쉬운 보복주의나 민족주의적 오류들을 거시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2·28 위안부 협상이 끝나고, 시민사회운동 진영은 단일한 목소리에 가까운 형태로 협상내용을 비판하고, ‘재협상’이나, ‘완전무효’를 주장해왔다. 협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한미일 군사동맹에 대한 문제제기 또한 이슈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다양한 정치세력들 간에 입장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평화주의에 기반을 둔 평화운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 패권을 비판하는 평화운동은 쉽게 결론지어지거나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는 일은 역사와 정세라는 두 개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사회운동 작은책’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된 이 책은 우리에게 그런 시선을 남겨주기 때문에 충분히 ‘큰’ 책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