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세계
- 2015/12 제11호
세계 화물노동자들이 함께 외치는 ‘안전운임’
안전운임 제도와 풀무원노동자들의 투쟁
지난 9월 4일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소속 풀무원 화물노동자들이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노예계약서(도색유지서약서) 폐기, 노사합의 이행, 노동탄압 중단 및 화물연대 인정, 산재사고 보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10월 24일에는 조합원 2명이 국회 앞 광고탑에 올랐고, 한 달 가까이 고공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풀무원 조합원들이 광고탑에 오른 날, 20년 넘게 안전운임을 위해 싸워온 해외 노조간부와 학자들이 한국에 도착했다. 10월 28일 열린 <신자유주의의 안전 위협과 운수노동자의 대안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체류 기간 해외 참가자들은 촛불집회와 기자회견에 참가하는 등 풀무원 투쟁에 적극 연대했다.
풀무원은 조합원 40명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투쟁이지만 규모에 비해 탄압이 거세다. 수많은 조합원들이 수배·연행·구속되었고, 경찰은 화물연대본부뿐 아니라 공공운수노조 전체 사무실을 강제 압수수색하려고 시도했다. 물류센터 봉쇄와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의 권리 보장을 요구했음에도 해법을 찾기 어려웠던 여느 비정규직 투쟁들처럼, 우리에게 풀무원 화물노동자의 투쟁 역시 대기업 풀무원에 맞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그저 안타까운 싸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외에서 풀무원 투쟁을 바라보는 눈은 다르다. 세계 화물노동자의 가혹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원칙’을 세우기 위한 선도적인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안전운임’이라고 불리는 이 원칙은 풀무원 조합원들을 비롯한 많은 화물노동자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운수노동자 임금 상승 시 사고 감소”
‘안전운임’은 화물운송시장의 기본적인 원리부터 그 대안까지를 압축적으로 지칭하는 원칙이다. 동시에 그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법제도와 조직화 및 투쟁전략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칙으로서 안전운임은 두 가지 개념을 갖고 있다. 첫째, 화물노동자들이 받는 운임과 그것이 결정되는 방식은 사고 발생률과 직결돼 있다. 둘째, 공급사슬 정점에 있는 화주는 운임(과 운임 결정 방식)을 결정하고, 운송업체와 화물노동자에게 이를 강요하기 때문에 도로 안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탈규제 상황에서 화주들은 낮은 운임을 지급하여 위험한 운전행위를 강요하지만, 사고에 대한 책임은 회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인 안전운임 개념은 적정한 운임 지급과 안전한 근로환경 제공에 대한 화주의 책임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안전운임 원칙은 화물노동자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운행이나 적재량에 따라 지급되는 운임이 낮기 때문에 화물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인 과속·과적·장시간 운전을 한다. 풀무원 노동자의 경우 월별 기본 운임이 정해져 있지만 그것이 워낙 장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하는데다 추가 운행 역시 피하기 어렵다. 또한 불법적인 차량 개조가 만연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화물노동자들에게 상하차 업무까지 강요한다. 이런 구조로 인해 풀무원 화물노동자들은 잦은 부상을 감내하고, 사고 위협에 노출된 채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마이클 벨저(미국 웨인주립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운임이나 운임 지급방식과 안전의 관련성을 입증한 여러 연구를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제2위 트럭 운송업체인 J.B.헌트에서 운전 노동자의 임금 10퍼센트 상승 시 전체 사고 가능성은 40퍼센트 감소했다. 또한 대형트럭 충돌사고 원인 연구를 통해 “업무 압박감과 피로감이 높을수록 사고로 연결되는 운전자의 실수도 많아지고”, “운전자가 안전운행 보너스를 받거나 더 적은 시간을 운행할 경우 이러한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안전운임 제도의 세계화
안전운임은 학자들만의 개념이 아니다. 호주에서는 이미 제도화되었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검토되고 있다. 호주의 ‘도로안전운임법’은 운임과 그것의 지급 방식, 위험한 운전행위와 사고의 관계를 근거로 도로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화주들이 책임져야할 최저 운임과 지급 방식, 대기시간에 대한 보수를 비롯한 노동조건을 규정하는 안전운임심사위원회를 설립했다. 심사위원회는 올해 안에 특수고용 화물노동자들을 위한 표준운임을 발표할 예정이며, 그 운임은 애초 노조에서 예상한 것보다 높은 수준이다.
처음 안전운임법이 생겼을 때에는 호주만의 제도였지만,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달라진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10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열린 ‘도로운수 안전 보건에 대한 노사정 회의’에서 노사정 대표들이 안전운임 제도를 같이 검토했다. 노사정 대표들은 캐나다, 일본,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제도의 핵심 요소(운임과 안전의 관계 인정, 적정한 운임, 화주의 책임)가 부분적으로 도입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2008년에 정부가 호주 안전운임과 매우 유사한 표준운임제의 도입을 약속했지만 시행되지 않고 있는 점, 표준운임제가 시행되었다면 한국 화물노동자들이 풀무원과 같은 악덕 화주의 횡포에 조금 더 쉽고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도 지적됐다.
ILO 회의에서 노사정 대표들은 안전운임 원칙을 확인했고 안전운임 관련 연구 사업을 진행하고 국제 행동강령을 개발할 것을 ILO 사무처에 주문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은 2016년 3월 이사회를 거쳐 ILO 사업계획에 반영된다. 벨저 교수는 ILO 회의를 소개하면서 안전운임이 비단 한 나라의 제도가 아니라 국제적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세적 투쟁과 조직화의 전략으로
원칙이나 제도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영감을 주는 것은 안전운임 투쟁과 조직화 전략이다. 마이클 케인 호주운수노조 사무부총장은 호주에서 안전운임 투쟁이 처음부터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전체 화물운송시장을 조직하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강조했다.
20년 전 호주운수노조가 처음 안전운임 투쟁을 설계했을 때 화주들의 비용절감 경쟁 속에서 낮은 운임은 운송업체에, 또 운송업체를 통해 화물노동자에 강요되었다. 이는 화물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할 뿐 아니라 트럭사고로 해마다 330여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에 대한 장기적 대안으로 호주운수노조는 전체 시장을 조직하고, 노동 기준을 향상시키는 협약을 화주와 체결할 것을 제시했다. 즉, 시장을 통제하는 대표적 화주들을 꺾어 좋은 운임과 노동조건을 보장하고 노조를 인정하는 운송업체만 쓰도록 강제하여 전체 시장에 파급효과를 만들고 대규모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호주운수노조는 대기업 운송업체에 속한 노동자들을 전략적으로 우선 집중 조직하고, 노조활동을 위한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단협을 체결했다. 다음으로 이 조합원들에게 안전운임 관련 교육을 실시하여 다른 화물노동자들을 안전운임 투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조직활동가로 양성했다. 현장 조직활동가들과 함께 더 많은 노동자를 만나면서 안전운임 개념을 그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과 연계해서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안전운임법은 기업의 담을 넘어 화물노동자 간 단결을 강화하고 사회적 여론을 조직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였다. 대 화주 투쟁을 할 때마다 안전한 운임을 규정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대외적으로 제기하여 투쟁의 의미를 확대하고 시민의 연대를 호소할 수 있었다.
안전운임법 도입 후 호주운수노조는 법을 근거로 주요 유통업 대기업 화주와 안전운임협약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호주의 양대 마트 체인 중 하나인 콜스(Coles)를 대상으로 안전운임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물류센터 봉쇄, 대주주총회 투쟁, 시민불복종 등 공세적인 투쟁을 진행 중이다. 양대 마트 체인 중 다른 하나는 이미 협약에 잠정 합의했다.
ILO 노사정 합의는 호주운수노조가 안전운임 투쟁의 다음 단계로 추진한 것이다. ‘안전운임의 세계화’라 할 수 있는 이 단계는 안전운임을 국제 기준으로 만들어 각 나라에서 제도 개선을 요구할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세계 화물노동자의 공동요구를 제시하고, 세계를 포괄하는 공급사슬을 조직하기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세계 속의 풀무원 투쟁
풀무원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세계적인 그림 속에 놓여 있다. 물론 호주운수노조의 대 콜스 투쟁처럼 계획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은 아닐 지 모른다. 그러나 풀무원 조합원들의 투쟁은 안전에 대한 화주의 책임과 그것을 책임지도록 강제해야할 필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이며, 세계 화물노동자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번 투쟁이 세계적인 투쟁의 그림 속에 제대로 위치지어지고, 세계 화물노동자들의 공동 투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단기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기적인 싸움엔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
* ‘안전운임’은 호주에서 먼저 개발한 ‘Safe Rates’의 번역어이다. 원래 Rates는 직접고용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나 특수 고용노동자가 받는 운임을 포괄하는 ‘지급률’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급률’이라는 표현의 어색함과, 한국의 화물노동자 대다수가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사실을 감안하여 화물연대에서는 이를 안전운임으로 번역해 왔다. 최근 안전운임 개념을 버스, 택시 등 여타 부문에 적용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앞으로는 번역어의 수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안전운임’으로 쓰지만, 직접고용 상황에서 이는 ‘안전임금’으로 대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