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12 제11호
독재 대 민주화 대립의 신화
국정교과서 논란은 '민주화 프로젝트'의 실패 때문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독재 대 민주’는 여전히 한국의 정치적 갈등에 자주 호출되는 강력한 틀이다.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해 논란이 되었던 지난 한 달 동안에는 그 대립구도가 특히 더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 언론, 시민들의 표현에 따르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독재자의 딸’이 역사를 권력의 입맛에 맞게 획일화하려는 ‘역사쿠데타’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친일·독재를 미화할 것이다. 반대 여론이 상당한데도 공론화 한 달 만에 국정화를 확정해버린 정부의 독단적 태도는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게 한다.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자들의 논리와 방식이 가진 문제점을 찾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독재 대 민주’라는 해묵은 대결구도는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에 충분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국정교과서에 맞선 싸움은 왜 현실에서 활로를 찾지 못하는가? ‘보수 정권에 맞서는 민주시민들’이라는 기획은 싸움에서 승리하는 전략이 될 수 있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도발로부터 10여 년 전 시작된 한국사 논쟁은 왜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기존 역사학·역사교육에 어떤 맹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 자본주의 분석의 공백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발전 양상에 관한 연구의 부족은 뉴라이트 계열 연구자들의 ‘반격’을 불러일으킨 주된 요인이었다. 해방 이후 1960~70년대까지 한국사 연구에서 근현대사는 거의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아 정부 주도의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1980년대 들어서야 시작된 민간 역사학계 근현대사 연구의 주된 흐름은 ‘외세의 개입과 부당한 권력에 맞선 민중의 저항’에 초점을 맞춘 정치사, 운동사였다.
반면 2000년대 들어 뉴라이트 계열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경제성장’에 주목하여 근현대 한국 경제사 연구의 공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2005년 뉴라이트 계열 단체인 ‘교과서포럼’ 출범 당시 심포지엄에 참여한 김재호(전남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존의 근현대사교과서가 “근대화과정이 없는 민족운동사 편중의” 역사서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금의 교과서가 근대를 “약탈과 수탈, 그리고 그에 대한 대항이 아닌 경제활동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김재호, 〈국사 및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경제사 서술비판: 근대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가 곧 세계 자본주의 경제 질서 로의 편입 과정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 전략과 그 정확한 궤도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사 연구자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 역사연구에 경제적 분석이 부족하고 민족운동사가 지나치게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는 교과서포럼의 주장이 “일면 타당한 지적”이라 인정하고 있다. (신주백, 〈역사교과서 서술과 역사인식〉)
한국 근현대사에서 경제발전을 두고 가장 논쟁이 되는 시점은 일제강점기(1910~45)와 박정희 통치기(1961~79)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둘러싸고는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박정희 통치기를 둘러싸고는 ‘수탈·폭압론’과 ‘경제성장론’이 대결을 벌이고 있다. 두 시기,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외세의 개입과 국내에서의 폭압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한국 경제가 발전해 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근대화 과정의 ‘굴절’을 강조하느냐, 결과적인 ‘발전’을 강조하느냐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가 되어 도돌이표 같은 논쟁으로 반복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수탈·착취의 강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자본주의는 식민지 확대 경쟁을 통한 제국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경제의 기반이 닦였다. 분단 이후 남한사회가 택했던 발전전략 역시, 상당 부분은 자본주의 세계체계와 미-소 냉전 대립 속에서 ‘이미 규정된 경로’를 따른 것이었다.
‘경제발전은 필요했으나 독재는 문제였다’는 역사관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남한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다른 경로’가 완전히 불가능했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지만, 그것은 나쁜 것(군부독재, 경제적 불평등 등)은 제거하고 좋은 것(경제발전, 근대화 등)을 취하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즉, 독재와 착취에 대한 도덕적 비판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민주화운동’으로 순치된 민중운동사
‘근현대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1980년대 남한 민중운동의 형성과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습득했던 세계관이 깨지는 경험을 일컫는 ‘의식화’의 핵심 커리큘럼이 바로 한국근현대사였다. 대학가에서는 식민지와 분단으로 굴절된 근대의 경험, 반민족·반민중·반민주적 성격의 정권과 그에 저항한 민중들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했다.
당시의 문제의식은 민주화 이후 1990년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5·18의 국가기념일화,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 등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사 교과과정에도 일정 부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운동이 국가의례나 교과과정으로 공식화 되는 과정에서 운동 주체들은 ‘선량한 민간인(희생양)’으로 그려지고, 운동의 변혁성은 지워지는 경향이 발생했다. 정부에게 검인정 받아야 하는 역사 교과서 속에서 현대사는 ‘독재에 맞서 승리한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되었다. 체제 변혁을 꿈꾸었던 민중운동의 역사는 독재정권에 맞선 ‘생존권 투쟁(주로 노동자농민)’과 ‘민주화 투쟁(주로 대학생 및 재야지식인)’이라는 두 흐름으로 길들여져 기록되었다.
반면에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미-소 냉전체제 대결구도와 남북 분단 속에서 실제 남한사회의 전복을 꿈꾸는 좌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억압은 필연적이었다.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건국과 부국 현대한국정치사 강의》 《대한민국을 만들다》 등 교과서포럼 필진들이 출간한 근현대사 교양서를 살펴보면 시대마다 국제질서에 대한 서술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냉전이라는 제약조건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이 반공국가의 부활이라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인식을 철지난 이념논쟁으로 치부하며 남한 운동사를 ‘민주화운동’으로 단순화하려는 시도 역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분단 이후 남한 사회의 척박한 조건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밝히고, 노동자 민중과 함께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운동은 실재해 왔다. 이 사실에 대한 간과는 민주화세력이 허용하는 ‘민주주의의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87년 민주화 프로젝트의 실패
마지막으로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처한 정치적 조건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것은 ‘87년 민주화 이후의 경험이 남긴 좌절감’이다.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외교안보정책이나 경제정책은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IMF의 권고사항보다도 강력해 ‘IMF 플러스’라 불리는 한국사회 구조조정을 감행,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를 밀어붙였던 것이 김대중 정권이었으며, 노무현 정권 하에서 국내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추진된 한미FTA 협상과 이라크 파병은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더욱 깊숙이 편입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시간을 거치면서 오히려 민주화세력에 대한 환멸이 극대화되었고, 민주주의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초라한 현실은, 민주세력의 역사인식이 갖는 맹점과 무관하지 않다.
‘선의’만으로 변화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지금 역사교과서 논란이 보여주는 것은 ‘독재 대 민주화’라는 민주화 세대의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민주화에 대한 낭만적 향수에 기대서는 국정교과서 논란에서의 승리도, 보수가 주도하는 정국의 역전을 꾀하기도 어렵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 시작은 현재 한국 자본주의가 처한 문제에 대한 분석·대안을 만드는 것, 민주화세력이 그어 놓은 민주주의의 경계선을 확장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