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5/12 제11호
폭력연습
인생은 연극. 이제는 흔해빠진 비유가 된 셰익스피어의 발상이다. 때로는 위로가 된다. 지리멸렬한 내 몫의 삶이 실은 나라는 한 배우에게 주어진 역할일 뿐이라니, 얼마나 속 편한가. 하지만 그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삶이 리허설 없는 무대고, 우리는 그 위에 대본도 없이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덕분에 이 어수룩한 배우들은 인간 행동과 감정의 이치를 실시간 경험을 통해 직접 배울 수밖에 없다.
민중총궐기를 두고 벌어진 과잉진압-폭력시위 논란을 보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게 된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정부는 유례 없는 폭력의 전술을 보여주었다. 경찰은 들것에 실려 이송되는 부상자를 조준하고, 구급차에도 물대포를 발사했다. 의료활동을 방해하고 공격하기까지 하는 행위는 과잉진압 이전에 공권력 기본윤리의 파탄이었다. 직사로 쏜 물대포에 맞은 예순아홉의 농민운동가는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 그 와중에 정부는, 시위자들을 테러리스트에 등치시키는 논평을 발표했다.
오늘날 폭력은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난다. 광장에 포탄을 떨어트리는 것만큼이나 광장 입구를 틀어막는 것도, 무고한 사람을 구타하고 죽이는 것만큼이나 민중의 일상과 예술가의 사유에 검열의 사슬을 채우는 것도 심각한 국가폭력이다. 그 날 경찰은 처음부터 시위자들을 벽 앞에 서게 하고, 열리지 않을 문의 대치자로 만들었다. 경찰차를 고정시킨 쇠사슬은 대화 의사가 전혀 없다는 일방적 통보였고, 야만이었다. 요컨대 시위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그저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이라는 개념을 희석시키고 시위대의 자연스러운 분노에 폭력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비열한 전략이었다.
거대한 폭력을 자행하는 자들이 틀 안에서 질서를 지키면서 목소리를 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생이 연극적이라는 말을 수긍한다 해서 삶에 임하는 태도마저 연극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기계적 중립성에 매몰된 이성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 반복되는 경험 속에 무뎌지는 것이다. 폭력은 명사로 존재하지 않고 동사로 존재한다. 누군가 쓰러지고, 피를 흘리고, 다치고, 도망가고, 가족을 잃는다. 이것이 폭력의 실제이고, 대본을 따를 수도 대역을 쓸 수도 없는 분노에 길을 터주어야 할 이유다.
지금 우리는 또 다른 폭력의 사례를 마주하고 있다. 아버지의 역사를 잊지 못하는 딸이 전국민의 교과서를 입맛대로 각색하려 하고 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에 기초해 오늘의 한국을 미화하는 교과서 국정화는 역사에서 민중의 삶과 저항을 삭제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이러한 폭력에 길들여지지 말되, 폭력에 응답하는 좋은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우리가 멈춰 세우지 않는 한 폭력은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