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11 제10호

'험악한 광대들'의 차가운 이야기

로랑 캉테의 <인력자원부>

  • 홍명교 편집실 미디어국장
 
신자유주의 시대 전 세계 흙수저들의 아킬레스건은 세대갈등인가? 로랑 캉테의 데뷔작 <인력자원부>(1999)는 구조조정을 목전에 둔 어느 공장의 노동자들이 겪는 세대갈등을 30년 내내 생산직으로 뼈 빠지게 일한 아버지와 파리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무직 인턴 아들 사이의 갈등에 유비시킨다. 마치 최근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밀어붙이며 노동자계급 내의 세대갈등을 조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기차 소리만 들리는 영화의 시작. 주인공 프랑 베르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아산이나 안성 같은 작은 공단도시를 연상케 하는 그 마을의 시민들은 대부분 같은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 해왔고, 젊은 프랑은 이 공장 ‘인력자원부’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로 했다.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교육의 수혜자인 프랑은 이 공장에서 주35시간 근무제 도입에 관한 임무를 맡는다.
 

정체불명의 메커니즘을 경계하라!

공장 한쪽엔 덫이 놓인 치즈를 갈망하는 쥐와 “Mefiez Vous D'un Mecanisme Inconnu(정체불명의 메커니즘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그려진 포스터가 보인다. 이 포스터는 이후 영화 속 노동자들이 겪게 될 참혹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가 만들어진 당시 프랑스는 주35시간 근로제 도입이 핵심 화두였다. 1990년대 중후반 극심한 실업률과 경기침체 속에서 총리 선거에 출마한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은 임금 하락 없는 주35시간 근무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고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근로시간을 줄여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취지다. 이후 10여 년간 사회당의 핵심 정책이었으나, 최근 심각한 실업률과 투자 감소로 좌파 정부 스스로에 의해 폐지가 거론되고 있다.

영화 <인력자원부>의 사장과 관리자들은 주35시간 근무제(오브리법) 도입 문제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자본은 결코 이윤이 줄어들 선택을 하지 않으니 묘수가 필요했던 셈이다. 곧 법이 바뀐다 하니 도입하긴 해야 하고, 섣불리 도입하기엔 무언가 불안한 관리자들. 게다가 노동조합은 임금이 불안정해지고 지난해에도 이미 스물두 명을 해고한 회사가 무슨 짓을 할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회사가 제시하는 35시간제 도입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축소시키고 ‘어린애들 싸게 부리려는 속셈’이라는 것이다. 프랑의 친구들 역시 35시간제가 여간 미덥지 않다. 실제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은 사회당 정부의 이 정책을 그리 지지하지 않았다. 노동권이 축소되고 있는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사측은 완강한 노조에게 “회사가 잘 되어야 노조도 잘 되는 거지!”라고 응대한다. 오늘날 노동개악 정세의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닮아있다.
 

자본가의 이이제이(以夷制夷)

공장의 풍경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루 700개 정량을 뽑아야 하는데 이렇게 느려서야 쓰겠냐’며 핀잔 가득한 고함을 지르는 현장관리자, 쉴 틈 없이 선반이나 사출, 금형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들, 작업 개시가 조금만 늦어져도 경기를 일으키는 사장까지. 몽상가들이 이야기하는 선진 프랑스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공장에서 프랑의 아버지는 30년째 일 해왔다. 그는 좋은 학교를 나와 양복을 입고 출근한 아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자신과는 다른 인생을 살 게 될 거라 믿는다.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프랑은 노사 모두가 윈윈하는 합리적인 기업환경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제가 양복 차림에 사무실에서 일하니까 노조는 제가 적 같겠지만 35시간제는 모두에게 득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국면에 인턴으로 들어온 프랑은 ‘35시간 근무제를 위한 전제조건’을 평가하는 일을 맡는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공장 노동자들과도 잘 아는 그가 회사의 입장을 영리하게 관철시켜주길 바라는 회사의 속내가 느껴진다.

인력자원부의 일에 충실한 프랑은 노조가 너무 완강하게 반대하자 반감을 갖는다. 노조가 현실적이기 보단 정치적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떠오른 프랑의 계책이 노조와의 교섭을 우회한 직원 대상 설문조사다. 이 소식을 들은 노조는 노조법 위반이라고 항의하지만 프랑은 이것이 합법적이라는 점만 강조할 뿐이다. 선의에서 시작한 그의 행동이 노동자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법과 권력에 기댄 방향으로 우회하면서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한다. 프랑이 모르는 사이 문이 닫힌 인력자원부 사무실에선 어떤 모략이 진행 중이다. 영화 내내 신사적이었던 사장은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빨갱이들은 광대들 같아. 하지만 험악하지!”
 

 

“난 아빠가 창피해! 알아요?”

평생을 공장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어떤 자긍심도 가질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부끄럽고 치욕스럽다고 말하는 아들 프랑의 모습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헐값 취급받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웬만한 이야기라면 부자의 화해를 보여주고, 결국 함께 투쟁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음직도 한데 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국면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공장을 장악하는 클라이막스 이후다. 에너지가 넘치고 점점 드라마틱해져야 할 시점에 갑자기 모든 게 나른해지고, 무기력해진다. 프랑은 파업이 시작된 그날 파리로 떠나겠다고 하고, 아들 걱정에 자존심도 버렸던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파업에 합류한다. 모든 것은 뒤죽박죽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규정했던 위치들은, 조롱받는 듯 와해된다. 이 영화가 전통적인 저항 드라마와는 다른 면모를 갖고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일종의 ‘낯설게 하기’인 셈이다.

이 영화를 통해 늦은 나이에 데뷔한 로랑 캉테는 실제로 실직 상태에 놓인 비전문 배우들과 함께, 어떤 배경음악도 없이, 실제 운영되는 공장에서 영화를 찍었다. 그는 “‘인력자원(Ressources Humaines)’이라는 파렴치한 합성어에 대해 반발하고자 이 제목을 썼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인간이 마치 주식이나 상품처럼 관리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비판하려 했던 것이다.

1999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드러내고 있듯 실제 2005년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은 주35시간 근로제에 대대적 수술을 가한다. 노동자들은 경쟁적으로 연장근무를 원하기 시작했고, 자본가들은 이런 점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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