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11 제10호
370만 일반해고 시대?
일반해고요건 완화 배경과 효과 분석
정부가 밀어붙이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핵심은 일반해고 요건 완화다. 한국에서 형식적으로 합법적인 해고는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나 노동자가 회사에 명백하게 손해를 끼쳤을 때만 가능하다. 전자를 정리해고, 후자를 징계해고라고 부른다. 노동자의 업무 능력을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지금까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되었다.
물론 형식적으로 그렇단 이야기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의 노동시장을 비규제 영역이라고 규정하기도 하는데, 규제가 없지는 않으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규제가 지켜지는 공무원이나, 강한 노조로 사용자를 견제하는 일부 민간 사업장 노동자를 제외하면, 사용자가 자의적 업무 평가를 근거로 해고해도 노동자가 이를 거부하긴 쉽지 않다. 법적 감시가 상대적으로 강한 대기업들이 경영상의 위기를 꾸며내어 수천 명을 버젓이 구조조정하는 현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일반해고는 이미 일상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강하게 일반해고 요건 완화를 밀어붙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관행적으로 법적 문제 소지를 안고 이뤄지던 일반해고를 이제 좀 더 쉽게, 대규모로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리해고나 징계해고가 아닌 해고는 현실에서 노동자를 괴롭혀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도록 만드는 형태로 이뤄진다. 이런 해고가 대규모로 이뤄지면 조직 내 부하가 크다.
그러나 일반해고가 제도적으로 승인되면, 이제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You're fired!(넌 해고야)” 한마디로 해고되는 게 가능해진다. 특히 경영상의 이유를 명분으로 하기 힘든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 대규모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함에 따라 자본의 해고 욕구는 이미 커진 상황이다.
최소 100만 최대 370만이 일반해고 대상자
그렇다면 앞으로 일반해고가 제도화되면 어느 정도 규모로 해고가 이뤄질까? 이전에 이뤄지던 퇴직 형태를 분석해 보면 이를 추산해 볼 수 있다.
고용보험통계에 따르면 2013년 고용보험 가입자는 1157만 명이고, 이중 퇴직자는 561만 명이다. 놀랍게도 한 해 고용보험 가입자 중 절반이 직장을 잃거나 옮기는 것이다. 실업급여 대상이 아닌 자발적 퇴직자가 335만 명이고, 실업급여 대상인 비자발적 퇴직자가 221만 명이다.
일반해고 범위를 예상해보면, 자발적 퇴직자 중 기타 개인사정으로 포함되는 270만 명 중 일부와 비자발적 퇴직자 중 정리해고, 계약기간만료, 정년퇴직을 제외한 나머지 100만 명일 것으로 보인다. 즉 고용보험가입자 중 최소 100만 명에서 최대 370만 명이 일반해고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날 수 있는 노동자란 것이다. 이는 고용보험가입자의 9~32퍼센트에 달하고, 퇴직자 중에서는 18~66퍼센트에 해당한다.
물론 실제는 이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괴롭힘, 업부재배치 등 자본으로서는 꽤나 거추장스럽고 소란스러운 탄압의 과정을 통해서야 해고시킬 수 있었던 부분이 아주 간명해지기 때문이다.
통제와 해고의 일상화
정부는 업무성과 평가 기준을 규격화함으로써 오히려 해고를 노사 모두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한참 동떨어진 소리다. 무엇보다 대부분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성과평가 기준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나 자본이 예로 드는 해외 사례들의 상당수는 노조가 평가 기준과 평가 내용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퍼센트도 되지 않고 또 그 중 상당수는 사용자 친화적인 어용노조다.
사실 지금도 현장에서는 관리자에 의한 일방적 자의적 평가가 문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주 입장에서 보면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성과평가에 기반을 둔 해고나 차별대우가 현장을 통제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사무직에서 많이 쓰이는 상호 평가 방식의 성과평가(내부고객평가)를 살펴보자. 이 방식은 몇 개의 문항을 가지고 팀원 간 점수를 매겨 이를 팀장이 종합해 성과평가를 내리는 것인데,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팀의 각종 시간 외 업무를 무료로 하거나 관리자의 개인적 일까지 봐줘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팀원 간 상호통제나 평가자인 관리자의 통제권에는 확실한 효과를 보이지만, 직무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일반해고가 제도화되면 이런 자의적인 업무 평가가 해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된다. 사용자들이 해고를 무기로 노동자 간의 무한경쟁과 현장통제를 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는 셈이다.
되돌릴 수 있을까
정부는 해고를 쉽게 해야 고용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해고로 인해 일자리 숫자가 늘어났다는 보고는 찾을 수 없다. 단적으로 1998년 이후 한국 노동시장은 유연화 한 길로 내달렸지만 고용률이나 실업률이 개선되진 않았다.
지금은 저성장과 경제위기 재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인력을 쉽게 감축하고 싶어 하는 사용자들의 동기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상황이다. 일반해고로 대규모 구조조정을 일상적으로 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요컨대 국내 1위 재벌기업 삼성은 전체 인원의 10퍼센트를 줄인다는 계획을 진행 중인데, 이미 일반해고 제도화로 인해 권고사직이나 희망퇴직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경북교육청은 얼마 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취업규칙을 일방적으로 제정해 업무평가로 해고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저성장에 대비하려는 대기업, 재정문제를 겪고 있는 공공부문 모두 노동자를 잘라내는 데 있어서 이미 일반해고를 요긴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해고는 제도가 정비되기도 전에 이미 그 효과를 발휘 중이다. 노동운동의 대응에 따라 이후의 양상이 갈릴 것이다. 11월 민중총궐기를 시작으로,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막아내기 위한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투쟁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
경제위기와 노동시장 유연화의 상관관계 : 1996년과 2015년
김영삼 정권 후반기에도 노동시장 유연화가 줄기차게 시도되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3저 호황 효과가 사라졌음에도 재벌들이 해외차입을 통해 과잉투자를 지속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재벌들의 부채비율은 300~500퍼센트까지 상승했다.
김영삼 정권은 1995년부터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했는데, 노동자를 쥐어짜 부채를 갚는 길 말고는 재벌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권은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이 상황을 엎을 만큼 힘이 없는 반면에, 김영삼 대통령 지지도가 높아 얼마든지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보고 1996년 12월 25일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켰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는 1997년 외환위기를 피해갈 순 없었다.
지금은 당시만큼 재벌들의 재무구조가 부실하진 않지만, 세계경제는 훨씬 더 안 좋은 상황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몇 년간에 걸쳐 그럭저럭 회복된 건 재벌들의 부채를 국가와 노동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전가했고, 여기에 세계경제가 본격적인 위기에 빠지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 내내 고통 받았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수입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소위 말하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세계경제 자체가 불황이고, 한국 경제가 꽤 오랜 기간 저성장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까지도 쥐어짜야 할 상황이 되었단 것이다. 이번 노동시장 구조개혁에서 일반해고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건 정규직의 과잉 안정성 탓에 청년 고용이 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대기업 정규직도 저임금 고용불안에 동참해야만 사업주들이 이윤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단 의미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그 생산성에 기대 수익을 높이는 것이 본연의 작동 방식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때는 언제나 자본주의 자체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했단 반증이기도 하다. 1997년만큼 급격하게 위기가 발생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더 오랜 기간 경제위기가 저강도로,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혹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