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5/10 제9호
강성노조
마감을 앞두고 ‘김 국장님’이라고 저를 지목한 독자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지난 호에 실린 금호타이어 사내하청 노동자 인터뷰 기사를 읽고 보내온 글이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김 국장님은 강성노조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 대한민국 강성노조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막무가내 식 투쟁을 한다는 것, 그래서 관리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잘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자신도 과거에 그랬다는 것, ‘객관적으로 그리고 현실에 입각한 글을 써주셨으면 좋겠’다는 부탁 말씀이었습니다.
새로운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저씨 두어 명이 모이고, 식당에 TV조선이 틀어져 있으면 자연스럽게 오가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데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건 요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입만 열면 강성노조 얘기를 하는 것과 이 편지가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강성노조만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다”는 말로 9월을 시작한 김 대표는, 노동시장 구조개혁 ‘야합’ 후에 이를 비판하는 모든 목소리에 강성노조의 억지 주장이란 딱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제 의문은 이렇습니다. 정말 이 나라에 강성노조가 있다면 해고를 쉽게 하고, 정년을 앞둔 노동자의 임금을 절반까지 깎겠다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안이 어떻게 ‘야합’될 수 있는 건지. 인도에선 노동법 개악을 막기 위해 1억 5000만 명이 거리에 나와 파업을 한다는데 왜 한국의 거리는 ‘지구상 어느 나라에도 없’이 조용하게만 느껴지는지. 그렇다면 새누리당은, 그리고 강성노조를 안주거리로 삼는 우리 모두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현실에 입각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국 노동운동이 그 전투성 때문에 주목받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미국과 유럽의 (한때는 한국보다 훨씬 더 강한 주장과 실천을 보여주었던) 노동운동이 활력을 잃어가던 시점에 터져 나온 한국 노동운동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빨간 머리띠와 쇠파이프가 필요했다면, 그것은 노동자에게 독재권력과 다를 바 없었던 정권과 자본에게 맞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번호 〈노조할 권리〉에서 만난 갑을오토텍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런 ‘폭력’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자본이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자본과 노동의 힘 차이는 더 커졌습니다. 《오늘보다》 10월호 특집에서는 ‘먹튀자본’이 어떻게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노동자의 기본권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강성노조란 이름이 무색할 만큼 한국의 노동운동은 방어를 위해 발버둥 친 지 오랩니다.
결국 지금 있는 노조의 힘만으론 안 됩니다. 많은 오래된 노조들이 고령화, 보수화의 늪에 빠져 고립되었고 자본은 온갖 방법으로 이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노조 바깥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함께하는 노조,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노조가 바로 ‘강한’ 노조고,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