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2015/10 제9호
일본 국회 앞에서 분노의 물결을 보다
패전 후 일본은 군사동맹국과 함께 전쟁을 하거나 타국의 분쟁에 무력개입을 하는 등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를 명문화한 일본국헌법 9조는 ‘평화헌법’이라 불리며 일본시민의 자랑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아베는 안보법안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과 자위대의 해외파견을 명시해 헌법을 어기고 일본을 평화국가에서 전쟁국가로 바꾸려 하고 있다.
분노한 일본시민들이 아베의 ‘전쟁법안’을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던 일본의 사회운동이 전에 없는 대규모 집회를 잇달아 성사시키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보다》 9월호에 소개된 일본 평화포럼 후쿠야마 신고 대표는 방한 강연 당시 8월 30일 투쟁에 연대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위해 2명의 사회진보연대 활동가가 이날 집회에 참가했다.
12만 명의 시민들 중에는 유독 노년층 참가자가 많았다. 이들은 공습, 원폭, 징병과 전사 등 태평양전쟁의 파괴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다시는 일본과 주변국 민중들이 그런 경험을 겪어서는 안 된다며 거리로 나섰다.
20대 청년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최근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실즈(SEALDs, 자유민주주의를위한 학생긴급 행동) 등 여러 청년들이 이번 전쟁법 반대 투쟁의 상징이 되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여겨졌던 젊은 세대도 정치적인 각성의 시기를 맞고 있다. 이들은 시위 내내 거리 곳곳에서 리듬감있는 구호를 외치며 분위기를 고양시켰고,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실즈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전쟁터에 끌려가거나 동년배의 자위대 군인들이 해외에서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뜻깊은 연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9월 17일 도쿄 시내에선 밤샘 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도 국회 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자민당은 결국 9월 19일 새벽, 법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하지만 일본 시민들과 사회운동은 투쟁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법안이 통과된 9월 셋째 주에는 3만여 명이 모이는 도심 집회가 매일 열렸고, 전쟁법안 반대 청원은 520만 명을 넘었다. 이 힘을 받아 앞으로도 대규모 집회를 계속할 예정이다. 분열과 침체에 허덕이던 일본 사회운동과 정당들도 모처럼 단결된 힘으로 전쟁법 폐기 투쟁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대중투쟁을 통한 집단적인 경험은 일본시민들에게도, 일본 사회운동에도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다.
8.30 집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죽이고 죽임당하는(殺して殺される) 일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일본 현지에서 매우 많이 쓰는 표현이다. 나는 이 표현이 단지 우리 국민이 죽임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타국의 국민도 죽이는 데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평화에의 갈망이라고 느꼈다. 9월 19일에는 8.30 집회를 준비한 <총궐기 실행위원회>가 ‘전 세계의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평화를 위해 시민들의 힘을 믿고 희망으로 전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군사적 긴장과 경쟁이 상존하는 동아시아에, 일본 시민들은 투쟁으로 평화를 이룩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여기에,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