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책보다
  • 2015/10 제9호

잊혀지고 빼앗긴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W.G.제발트, <이민자들>

  • 김민철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서비스지부 조직차장
 
(나는) 모든 목적과 목표를 상실한 듯한 공허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나마 얻고자 시내로 걸어가 (……)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 책의 주인공인 이민자들은 울거나 화내거나 고함치지 않는다. 그렇게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건조하고 차가운 문체로 행위들이 묘사되며, 그저 눈물이 흐르거나 얼굴이 찌푸려지며 살아가다가 어떤 스펙타클한 격정 없이 고단한 삶을 마감한다. 이때 화자인 ‘나’는 침묵 혹은 관조의 태도로 다른 동료 이민자들의 상황을 일러줄 뿐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이런 이민자들의 생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대중매체가 흔히 이주민을 다루는 신파조가 아니다.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결합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 때문에 독자로서 주인공들의 감정에 휩쓸려가지 않고 보다 천천히 이주와 인종이라는 테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의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내게 인종차별이나 이주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주제는 아니다. 친구가 이주노조에서 활동하고 있기도 하고, 대학 시절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해 수차례 세미나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간 나에게 이주노동자 이슈는 논리와 명제로만 존재했을 뿐, 그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일하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은 내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심리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주었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고향을 잃은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제국주의 전쟁이나 나치의 학살, 혹은 먹고살기 위해 이주하는 과정에서 상흔으로 얼룩진 삶을 겪게 된 이들의 여정과 애수가 이야기의 주요한 축이다. 고향을 떠나 시작한 삶이 당초 기대했던 것들을 충족시켜주는가와 무관하게 사랑했던 고향, 삶, 관계맺음과의 단절은 공허와 상실을 안겨 준다. 이처럼 이주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였던 모국어, 문화, 주거환경, 인간관계 등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로 낙인찍히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오죽하겠는가?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 주변에서 이주민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이주노조가 여러 굴곡을 뚫고 합법화되기도 했지만 이주와 인종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통해 이주민들의 상실과 공허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천적 연대의 출발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
덧붙이는 말

'책 이어달리기'는 《오늘보다》의 독자들이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짧은 글을 쓰는 코너입니다. 글을 쓴 사람이 다음 호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목하는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다음 주자는 이소형 공공운수노조 광주전남공공서비스지부 조직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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