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10 제9호

바다를 건너온 불법이주민들

시리아 난민 문제와 영화 <웰컴>

  • 홍명교 편집실 미디어국장
 
얼마 전 한 장의 사진이 세계인들을 울렸다.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을 피해 고향 코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향하던 세 살배기 에이란 쿠르디의 시체가 해변의 모래 위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2014년 이후에만 거의 1만여 명의 난민들이 바다를 건너다 목숨을 잃었다. 이런 비참한 일들이 우리가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알고 있는 지중해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다.

세계 여론은 유럽 각국 정부가 인도주의에 입각해 시리아의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년 간 시리아 내전으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10만 명 이상이 이미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목숨을 잃어왔는데, 한 장이 사진이, 이것이 저 먼 땅에서 나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유럽 지배계급의 정치적 리더인 메르켈 독일 수상은 유럽이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인도주의에 대한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리스 위기를 경과하며 의심받고 있는 독일의 리더십을 포장하기 위한 제스처로 보인다. 문제는 독일이 뒤에서는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솅겐조약(유럽연합 회원국 간 체결된 국경 개방 조약)을 무색케 하는 조치다.

혹자는 오늘의 시리아인들이 이스라엘 건국 이전 영토를 상실한 유태인들과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디아스포라 집단으로 유럽 땅에 왔지만 극우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분위기 때문에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오늘날 ‘유럽’의 의미를 되묻는 존재다.
 

쿠르드족 소년과 권태에 빠진 시몬

2009년에 만들어진 영화 <웰컴>은 미등록이주민들을 맞는 유럽의 시선이 어떠한가에 대해 묻는다. 시몬은 프랑스 칼레 시내의 한 기관에서 일하는 수영강사다. 그는 지독히 보수적이고, 이혼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고, 삶에 지쳤으며, 고독하다. 그런 그가 고집스럽게 반복하던 자신의 권태로운 일상에서 이탈하는 계기는 열일곱 살의 쿠르드족 미등록이주민 소년 비랄 때문이다.

비랄은 트럭 짐칸에 숨어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는 영국으로 가려다 실패하자, 헤엄을 쳐서 도버해협을 건너겠다는 결의로 수영장을 찾는다. 이 철부지의 황당한 꿈에 시몬은 조소를 보낼 뿐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 삶에 끼어들지 말라’고 말한다. 낯설지 않은 반응이다. 우리는 이방인, 낯선 타자에 대해 냉소적으로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몬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이 쿠르드족 소년의 삶에 끼어들게 된다. 처음에는 왜 수영도 잘 하지 못하면서 죽음에 처할지 모르는 모험을 감행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비랄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해 수영을 가르치고, 장비도 마련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을 방해하던 국적과 인종이라는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제도에 의한 인종주의

<웰컴>은 예심판사, 경찰, 행정당국과 같은 국가기구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마치 연대의 윤리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것들은 차라리 ‘인종주의’라는 적대를 제도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기구라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우연한 만남으로 칼레라는 국경도시의 고독한 반역자가 되어버린 시몬과 비랄은 이 위선을 폭로하는 매개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이 감행하는 ‘위험한 도박’은 이 제도들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위대한 도전이 된다.

한편 영화에는 지고지순하게 배식 자원봉사를 하는 시민운동가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자선 행위는 무기력하게도 기존의 체제에 수렴될 수밖에 없다. 칼레에서 시민들이 나서서 미등록이주민들을 돕는 것은 ‘불법’ 행위고, 저 시민운동가들에게 법이란 어겨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차에 태워주는 것도, 잘 곳 없는 이에게 몸 뉘일 곳을 제공해주는 것조차도 ‘불법’이다. 시몬은 점점 법의 경계 바깥으로 이탈할 수밖에 없다.

그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법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아파트의 여러 이웃들, 전 부인, 이주자들을 위해 배식 자원봉사를 하는 남자마저도 비랄을 재워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그만둬야 한다고 설득한다. 우리의 일상과 지인들 역시 세상을 통치하는 이데올로기의 촘촘한 그물인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는 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랄의 모험은 불가역적인 현실과 제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가난이나 전쟁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자신의 권리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모험이 마무리되는 <웰컴>의 마지막 장면은 서두에 언급한 시리아 난민 아이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비랄은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한 채 매서운 파도 속으로 사라진다. 

이 결말은 비단 한 순수한 소년의 죽음에 그치지 않는다. 비랄을 도우면서 잠시나마 희망을 품었던 시몬은 이제 삶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여자친구에게 비랄의 유품을 전해주려 런던에 간 시몬은 비랄이 동경했던 축구선수 호날두의 경기를 보게 된다. 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은 차가운 바다 거친 파도처럼 냉혹한 유럽 사회의 현실이 아니다. 누군가는 영영 이루지 못할, 잘 포장된 꿈일 뿐이다. 
 
 

혐오사회에서 국제주의 연대로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끔찍한 혐오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금융화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난민이 급증하고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주자들 탓이 아니다. 심지어 이주자들 자신도 정든 친구와 가족을 떠나 타국에 오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진 않았다. 살기 위해, 굶주리지 않기 위해 거처를 옮길 뿐이다.

페이스북에 흘러 다니는 시리아 난민 아이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공분을 표시하기는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세계인의 공감 물결을 타고 유럽으로 향하는 미등록이주민들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혹은 유럽 그 자신은? 아니면 우리는 그저 해외토픽 하나를 뜨겁게 소비한 것에 불과한가? 후자가 되지 않으려면 그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해, 그리고 도착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고민하고,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연대를 감행해야 하지 않을까? 

맨몸으로 홀로 해협을 건너는 것은, 자못 숭고하지만, 세계와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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