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10 제9호
먹튀자본을 막을 수 있는 원칙들
노동의 인터내셔널
200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대규모 투쟁은 상당수가 외국인투자기업의 극단적 구조조정과 자본철수와 관련 있다. 지엠(GM)으로의 매각 과정에서 4000여 명의 대규모 정리해고가 발생한 2001년 대우차, 홍콩 사모펀드에 의한 사기 인수합병으로 20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은 2003년 오리온전기, 상하이자동차가 기술유출 후 회사를 부도내 3000여 명이 해고된 2009년 쌍용차, 자본철수 위협 속에 용역깡패에 의한 노조탄압이 자행된 2010년 발레오만도, 특허권이 돈이 되자 현금만 챙기겠다고 대만 본사가 공장을 폐쇄해 버린 2015년 하이디스, 그리고 최근 5조 원의 차익을 남기며 사모펀드에 매각돼 대규모 구조조정이 예상되고 있는 홈플러스. 이 목록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자본과의 싸움은 내국인자본과의 싸움보다 어려움이 많다. 본사가 해외에 있어 노조가 실제 결정권자와 교섭할 방도가 없고, 자본철수라는 위협에 대응할 방법도 뾰족히 없는 탓이다.
기울어진 경기장, 왜 노동은 세계화하지 못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계화한 자본에 대항해 힘의 균형을 맞추려면 노동자 역시 세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일국의 정책적 규제로는 초국적자본의 이동을 막는 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진 한 나라의 자본이동 규제는, 큰 내수 시장이 있어 자본에게 충분한 이윤을 만들어 주는 조건이 아닌 한, 자본 이탈만 부추길 뿐이다. 결국 자본을 규제할 노동의 국제적 조직, 초국적기업의 노동자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하나의 조직으로 실제 경영책임자를 상대로 투쟁하고 교섭할 수 있는 국제적 형태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반대다. 초국적기업의 해외 공장 노동자들은 연대보다는 생산성 경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된 지엠 구조조정에서 미국, 유럽, 한국의 노동자 대표들이 사실상 공장폐쇄를 둘러싸고 연대 대신 생산성 경쟁을 선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본의 국제조직에 대칭되는 역할을 해야 할 노동자 국제조직들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가 가혹한 긴축과 노동권 축소를 강요할 때, 유럽노총은 유럽 노동자를 대표해 싸우지 못했고, 독일, 프랑스 등 채권국 노동자와 채무국 그리스 노동자의 연대를 조직하지도 못했다.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외국인자본에 의해 곤혹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노동조합이 초국적자본이 된 재벌의 해외 노동자들에 대해 진정성 있는 연대를 하지도 않는 이율배반적 상황도 그렇다. 예로 한국지엠 노조가 본사 생산계획 때문에 심각한 고용위기를 겪고 있지만, 같은 금속노조 소속인 현대차 노조는 구조조정 시 해외공장부터 한다는 단체협약을 가지고 있다.
왜 노동은 자본만큼 세계화할 수 없는 것일까? 오늘날의 노동자운동이 세계화한 자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본 세계화의 토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인 자본은 본성적으로 국제적이다. 예를 들면, 유럽 금융자본 로스차일드는 19세기 초에 유럽 전역에서 북미까지 금융 네트워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대공황 직전인 1928년 미국 자동차기업들의 해외공장은 20개국에 40개 가까이 되었다. 해외공장 증설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지엠의 경우 이미 1935년에 해외생산이 전체 생산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였다. 1980년대 이르러서야 세계화란 말이 사람들의 입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리지만, 사실 자본의 세계화는 18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자본이 이렇게 세계화를 쉽게 할 수 있는 건 세계 어디서든 통용 가능한 세계화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은 어느 나라에서 이윤을 내든 그 이윤을 세계화폐로 바꿔 다른 나라에서도 소유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유럽에서는 금이 세계화폐 역할을 해왔고, 20세기 초에는 금 태환 기능을 가진 달러, 1970년대 이후에는 달러 자체가 세계화폐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 이윤을 내든 달러로 환전해 타국으로 보낼 수 있는데 굳이 국적이 중요할 까닭이 없다.
높은 수준의 소유권 제도를 국제적으로 표준화시킨 것도 자본이 세계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다. 왕의 재산권 침해를 규제한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소유권을 천부인권으로 규정한 프랑스혁명 등의 근대혁명들부터, 화폐 소유권과 이동권에 관한 규제를 모두 없애버린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규제철폐, 그리고 소유권을 확장해 다양한 지적재산권을 세계적으로 제도화한 세계무역기구(WTO) 지적재산권협정까지. 자본은 세계 어디서든 소유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윤의 국적을 따지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노동자는 태생적으로 민족적이다. 자본의 재생산이 세계적 수준에서 가능한 데 반해 노동의 재생산은 대부분 민족국가 내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국적이 있어야만 기본권을 보장받는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20년 넘게 싸워서야 간신히 법내 노조 설립을 보장받았다. 자본의 세계적 소유권에 비견될 노동의 세계적 시민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할 능력 재생산이 민족국가 수준에서만 이뤄지는 점 또한 노동자가 세계화할 수 없는 제약조건이다. 학교나 보건기구와 같은 제도는 국가제도로만 존재한다. 세계 직업학교나 세계 산재보험 같은 건 없다. 자본은 세계 화폐로 어디서든 통용되지만 노동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민족국가 수준에서만 노동 능력을 보장받는다.
이렇기 때문에 노동의 세계화는 자본과 달리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는 ‘이념’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안세계 이념 없는 노동자 국제조직과 연대들의 한계
초국적기업에 맞선 노동자의 국제적 대응은 1960년대 중반부터 여러 방식으로 이뤄졌다. 특히 초국적기업화가 두드러졌던 미국 자동차 노조들은 각국의 노조들이 요구안과 협상전략을 공동으로 수립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국제금속노련은 세계자동차직장평의회 건설을 전략으로 해 지엠, 포드, 크라이슬러 등에 세계직장평의회를 건설했다. 하지만 투자와 고용에 관한 국제적 교섭력을 갖추겠다는 포부와 달리 이들 대부분은 별다른 성과 없이 사라지거나 유명무실해졌다.
이런 전략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산별노조 조직들에 의해 선언적 수준의 국제기본협약 체결 흐름으로 이어졌고, 50여 개 초국적기업에서 실제 체결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사법 판단의 주체나 강제력이 모호해 도덕적 기준 이상 역할을 하진 못했다.
초국적기업으로 인해 분쟁이 끊이지 않자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와 같은 자본의 조직에서도 초국적기업에 관한 규범들을 선포하기도 했다. ‘OECD다국적기업가이드라인’이나 ‘ILO 다국적기업 및 사회정책에 관한 원칙들의 3자 선언’이 대표적이다. 이 지침들은 노동3권 보장, 차별금지, 공정경쟁 등을 담고 있긴 하나 추상적 선언일 뿐이고, 강제력도 미흡해 노동조합이 이를 근거로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다.
생각해보면 초국적기업과 관련한 국제기본협약이나 국제기준이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준을 어겼을 때 이를 처벌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 범위에서 단체협약은 법적 강제력을 가지고, 노조가 이를 근거로 파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한다.
결국 관건은 이를 관철시킬 노동자 국제조직들의 힘이다. 국제노동조직들이 실질적으로 초국적기업에 압박을 가할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인데, 대부분의 국제조직들은 노사 상생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공정한 분배 정도를 지향으로 몇 가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제노총이나 국제산별조직들이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반공 이념 속에서 조직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들 조직들에 이러한 대안세계 지향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몇 가지 이해관계에 근거한 캠페인이나 조정 작업만으로, 초국적기업에서 서로 일자리 경쟁을 하는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관건은 어떻게 다시 세계의 노동자가 공동의 대안세계 지향을 갖출 수 있느냐다.
‘먹튀’의 궁극적 해법
지금도 홈플러스, 하이디스, 쌍용차 등 외투기업 노동자들이 어렵게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올해는 한국 저성장이 본격화되고, 세계적으로 초국적기업들이 다시 구조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커 한국지엠이나 르노삼성 같은 곳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외국인투자기업 종사자는 2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종속된 하청기업과 간접고용 노동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노동조합은 구조조정에 맞서 파업, 원정투쟁, 정부청원 등 여러 방식의 투쟁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 전체적으로도 외국인투자에 대해 경각심을 높여 규제들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그리고 세계경제의 침체와 한국 경제의 장기적 저성장 정세를 보건대, 해외에 본사를 둔 이들 기업들의 자본철수 위협과 한국 노동자들의 교섭권 제약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의 방식들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외국인투자기업 노동자들부터 함께 해결책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한국의 재벌 대기업 노조들이 해외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국제적으로 조직하고 함께 요구와 투쟁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사업장 별로 따로, 해외에 본사를 둔 기업의 노동자들 따로, 한국에 본사를 둔 기업의 노동자들 따로, 나부터 살자고 덤벼서는 답이 나오기 어렵다.
한국에서부터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단결하고 투쟁해, 세계 노동자들에게 대안세계를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최선의 방법이자, 국제적 연대를 실질적으로 만드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