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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
  • 2015/09 제8호

한국은 대안이 아니다

한국과 그리스의 구제금융 프로그램 비교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한국이 그리스의 모범?

초국적 금융기관들이 구제금융 프로그램에 관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 사례로 소개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재정긴축, 규제철폐,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IMF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해내며,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졸업하고 외관상으론 멀쩡하게 회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이런 평가들을 근거로 그리스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으스대는 기사를 내보낸다. 정말 그럴까? 1990년대 후반 한국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그리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국과 그리스의 구제금융 비교

IMF를 위시한 국제금융기구들이 채무국에 교조적인 긴축 중심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강요하는 것은 경제학적 근거가 확실해서가 아니다. 경험적으로 봐도 IMF 구제금융 이후 제대로 경제가 회복된 나라가 없다. 그럼에도 이들이 긴축을 신념으로 삼는 건 그만큼 이해관계가 분명해서다. 한국과 그리스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비교해보면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IMF 요구로 1998년 초부터 한국에서 수 개월간 계속된 고금리 정책은 서민경제를 완전히 박살냈었다. 20퍼센트까지 올라간 고금리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돈을 빌릴 수가 없었고, 전세와 월세 값이 크게 올랐다. 반면 외환위기 주범이었던 재벌들은 환율이 높아진 상황에서 여러 경로로 지원을 받아서 수출은 늘고, 부채 부담은 줄어들었다. 

2010년 1차부터 2015년 8월 3차까지 그리스 구제금융의 초지일관한 정책도 긴축이다. 한국이 통화긴축을 중심으로 했다면, 그리스는 재정긴축을 중심으로 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의 3차 구제금융안은 연금을 삭감하고, 소비세(부가가치세)를 늘려 3년 후에는 GDP 대비 3.5퍼센트 재정흑자를 달성하는 게 목표다. 만약 그리스 정부가 매년 정한 재정흑자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구제금융 지급이 자동적으로 줄어들도록 했다. 연금과 소비세를 핵심으로 한 재정계획은 당연히도 서민에게 매우 불리하다. 

시장규제를 철폐해 자본에게 유리한 경제조건을 만드는 것도 대부분의 구제금융 전후 이뤄지는 바다. 한국은 IMF 요구로 자본시장이 완전개방 되었고, 외국인투자에 대한 제한도 사라졌으며, 환율 변동 제한 정책도 철폐되었다. 한국은 이제 외국인자본들에 의한 주식시장과 환율시장 변동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 3차 구제금융은 특히 여러 시장규제 철폐를 그리스에 요구했는데, 대부분이 중소기업이나 농민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없애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현지에서 생산된 우유에 ‘신선품’이라는 표시를 했었는데, 이것이 수입산 우유를 차별한다며 별도 표시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식이다. 채권단 요구대로 중소기업과 농민을 보호하던 정책을 모두 철폐하게 되면 이들이 유럽의 초국적 기업에 의해 시장에서 축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민영화도 대표적인 구제금융 정책 꾸러미 중 하나다. 한국은 포항제철,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중공업 등 대형 공공기관 상당수를 주식시장에 상장시키거나 민간자본에 매각했다. 그리스에서는 그 어떤 구제금융 프로그램보다 가혹하게 민영화가 진행 중이다. 심지어 3차 구제금융 합의안에서는 그리스 국유자산 매각펀드를 룩셈부르크에 설치해 초국적 금융기관에 의해 그리스 국유자산을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경제 식민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IMF나 다른 국제기구에 의해 구제금융 전후 강요되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1996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날치기 처리된 노동법 개악이 민주노총 총파업으로 잠정 보류되었지만 결국 1998년 IMF의 협박 속에 다시 노사정위를 통해 모두 제도화되었다. 그리스는 집단해고, 단체협약, 파업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게 채권단의 요구다. 3차 구제금융 합의안에는 노동시장이 재정흑자나 경제성장에 방해가 되선 안 된다고 정리되었는데, 채권단이 특히 강조한 것은 노조의 권한과 관계된 것들이다. 그리스는 한국과 비슷하게 대기업, 공공부문의 대형 노조 중심성이 강하다. 이들을 무력화해 노동시장 자체를 완벽하게 유연화하겠다는 게 채권단의 구상인 것으로 보인다.
 

구제금융 프로그램 이후 한국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면 한국은 구제금융 이후 지금까지 꽤 경제성장을 해왔다. 하지만 껍데기가 아니라 실제 성장의 내용을 보는 게 중요하다. 

먼저, 성장의 배경을 살펴보자. 구제금융 이후 국민계정으로 측정되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미국, 중국, 유럽의 금융세계화식 성장에 한국 수출재벌들이 덕을 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과 유럽은 부동산, 주식, 파생금융상품 등의 자산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자산을 담보로 한 소비를 늘렸다. 1990년대 세계경제에 편입한 중국은 고성장하며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 재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소비시장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며 지난 10년간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건 재벌들이 수출경쟁력을 높인 방식이다. 1990년대 초중반 국내외 차입을 통해 과잉축적한 재벌들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산 중 부실 부분을 정부에 떠넘기고, 핵심 부분만 취했다. IMF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선진적 구조개혁으로 포장해 과잉축적의 이득은 재벌이, 손실은 국민이 지도록 만들었다. 당시 IMF는 재벌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실제적 이해관계는 철저하게 보호했다. 

다음으로, 성장의 분배도 문제다. 재벌 성장의 낙수효과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근로소득은 재벌 대기업 종사자와 재벌 대기업을 기준으로 임금을 올릴 수 있었던 공공부분 일부만 상승했고, 부동산을 소유한 부자들만 더 자산을 늘릴 수 있었다. 하위 소득자일수록 소득이 더 증가하지 않아 한국의 소득격차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특히 2000년대에는 그 속도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IMF 구조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자본시장 규제 철폐로 이런 소득불평등을 구조화했다. 노동시장유연화는 강한 노조나 지불능력이 없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항시적 고용불안과 저임금 상태로 내몰았다. 특히 한국은 초기업노조의 부재로 이런 상황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자본시장 규제 철폐는 외국 투기자본이 한국의 자산시장에 마음대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부동산과 주식 시장을 더욱 투기판으로 만들었다. 투기판에서는 언제나뜨내기가 잃고 물주가  돈을 딴다.

마지막으로 부가 축적되는 곳이 문제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성장 중 일부만이 국민계정에 반영되었다. 국가 지원과 국내 산업관계를 통해 성장한 재벌들은 이제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일부는 배당이나 내부거래를 위해 국내로 가져오지만 상당 부분은 해외자산으로 보유한다. 외환위기 때 헐값으로 기업을 인수한 외국인자본들은 고배당과 저투자로 투자금의 서너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필요가 없어지면 기업을 버리거나 재매각해 버린다. 자산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 자산가들은 한국 원화 자산만이 아니라 버진아일랜드 등의 조세회피지역에 달러 자산을 축장하는 게 일반화되었다. 이게 국내 총생산의 두세 배 규모다.

IMF 구제금융의 이런 프로그램은 초국적자본과 국내자본가들이 이해를 공유하는 지점이다. IMF가 강조한 세계화는 ‘세계적으로’ 부를 축재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 노동자운동, 대안적 선택이 필요하다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는 간접세를 통해 세입을 늘리고, 역시 노동자 서민에게 불리한 복지와 연금 세출을 줄이며,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을 제약해 노동시장 유연화를 높이고, 초국적기업에 대한 국내시장에서의 불리한 규제를 철폐하며,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줄이는 것이다. 한국의 구제금융 프로그램과 크게 차이가 없다.

물론 가장 큰 차이가 하나 있긴 하다. 한국은 세계경제가 그래도 성장하던 시기에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시행한 반면, 그리스는 세계경제마저도, 특히 유럽경제가 장기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 긴축과 서민경제 파탄을 야기할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시행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그나마 최악의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약간의 숨통을 틔었던 기회도 그리스에게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민중들에게 현재의 3차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치명적인 독이다.

그리스 노동자운동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통해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이대로 시행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1998년 그렇지 못했고, 이후에도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효과를 역전시키는 데 실패했었다. 그 결과 중소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노동자의 80퍼센트 가까이가 사실상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제도적 보호로부터도 배제되었고 한국은 최악의 소득불평등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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