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사회운동
- 2015/08 제7호
정치위기에 대한 반동적 대응
거부권 정국을 돌아본다
지난 5월 29일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연동해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이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어 7월 8일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한 사퇴 권고가 결정되고 유승민 원내대표는 헌법 1조 1항을 거론하며 사퇴했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거부권 정국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거부권 정국의 끝에 누가 웃고 있는가
유승민 사퇴는 임기 반환점을 지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사이의 정치적 거래가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박근혜 정부가 현 시점부터 레임덕에 빠진다면 그것은 새누리당으로서도 불리하다.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청 간, 그리고 친박과 비박 간의 갈등이 아직까지는 봉합될 수 있는 이유다. 김무성 대표가 강조하듯 아직은 “박근혜 정부의 성공이 곧 새누리당의 성공”이다.
하지만 내후년 대선이 가까워올수록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일체화는 새누리당에 불리하다. 2012년 대선에서 진보진영이 내세운 ‘이명박근혜’라는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심판하는 포지션을 선점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공약으로 내건 박근혜 후보였다. 정치적 거래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메르스 대응 실패로 인해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던 와중에 던진 승부수였다.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라는 강도높은 정치공세를 통해서 핵심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고 레임덕을 방지하는 데에도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물론 유승민 사퇴 직후 지지율이 소폭 하락하기는 했으나, 메르스가 진정국면에 접어듦과 동시에 대통령 지지율도 진정국면에 접어든 모양새다.
새누리당도 얻은 게 많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시간을 벌어준 동안 김무성 대표는 유승민 ‘명예퇴진론’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긍정적 포지션을 차지했다. 유승민의 경우에도 사퇴 직후 순식간에 헌법 1조 1항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상위권에 올랐고,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한 달 전에 비해 다섯 배나 폭등했다. 새누리당 지지율도 한 달 연속 상승세다. 이번 계기를 통해 2017년 대선에서 현 정부와 차별성을 획득하기 위한 준거를 명확히 마련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도 의미있는 성과다.
반면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새정치민주연합은 거부권 정국 내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주변화되었다. 국회법 개정안의 발단이 되었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실질적으로 바꾸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대안으로서 대중적 신뢰를 획득한 것도 아니다. 보수진영의 자중지란(같은 패 안에서의 싸움)으로 비쳤던 이번 거부권 정국이지만 이런 점에서 대통령도 친박도 비박도 새누리당도 패배하지 않았다.
국회를 우회하고 무력화하는 행정권력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국회법 개정안으로 돌아와보자. 국회법 개정안 통과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직접적 배경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이었다. 이 시행령은 특별법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특별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시행령은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업무범위를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것으로만 제한해 안전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제반조치를 다룰 여지를 크게 축소시켰다. 또한 특조위 구성에서도 90명의 직원을 구성한 후 6개월 이후 30명을 추가하도록 해 120명 이내로 특조위를 구성하도록 한 모법(母法)을 위배하고 있으며, 특조위 운영에 대해서는 특조위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모법을 위배해 해양수산부가 주도하게끔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부가 법률을 우회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 편법적으로 행정입법을 활용한 사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2014년 정부가 추진한 의료영리화가 단적인 예다. 정부는 영리자회사 허용과 부대사업 확대를 추진했는데 이는 의료법 취지에 반하거나 위임 범위를 초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료영리화 반대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는 국회를 통한 의료법 개정이 어렵다고 판단, 부대사업 범위를 확대하는 시행규칙을 발표하는 한편 영리자회사를 허용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편법적·우회적 의료영리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4월 노사정 협상이 결렬되자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일반해고 기준·절차 가이드라인과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취업규칙 변경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해고를 엄격히 제한하고, 취업규칙 변경시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도록 정하고 있는 근로기준법에 위배된다. 정부가 나서서 근로기준법을 개정할 경우 예상되는 노동자의 반대와 국회에서의 정치쟁점화를 회피하기 위한 독단적인 행정권 남용이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정치위기
이처럼 정부는 법률을 무력화하거나 국회에서의 정치쟁점화를 회피하면서도 입법에 버금가는 강제력을 행사하고자 시행령, 시행규칙, 행정해석, 지침, 가이드라인 등을 활용해왔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적 삼권분립에 비춰볼 때에도 문제가 많아 국회법 개정안은 법학자 사이에서도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행정입법권이나 사법심사권 등 삼권분립의 균형 모델이 아니다. 국민으로 위임받은 바에 반하거나 그 범위를 초과하는 행정권력의 자율성은 결코 옹호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보수진영에서 “입법 독재”라는 식의 비난을 제기할 수 있는 이유는 국회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그만큼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하면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했고, 그에 따라 국가의 정책적 자율성이 축소되었다. 그 결과 정작 중요한 쟁점에서 국회가 거수기로 전락하는 반면 허구적 쟁점을 둘러싼 이전투구는 오히려 심화되는 추세다.
이런 조건에서 전문가주의적인 싱크탱크나 행정부를 핵심축으로 반(反)대의제적 요구가 끊임없이 표출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일 안하는 국회’, ‘민생법안 발목잡는 국회’ 등 경기침체의 책임을 국회에 전가하더니, 여야 간의 공무원연금 및 공적연금 관련 합의안에 대해서는 “월권”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여야의 합의가 “월권”이라면 공적연금 결정권한은 누구에게 있다는 뜻인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유관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올 초 배포한 한 칼럼의 제목은 “정치인이 민생을 챙긴다고?”였다. 국회와 정치권의 무능을 일관되게 설파하는 이 칼럼은 “노선이니 이념이니 하면서 국민들 먹고 사는 문제를 표 얻는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고 국민들로 하여금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하도록 해 주는 것이 진정한 민생 정치”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대의제는 시끄럽고 불편하며 무익하지만, 그래도 민주국가에서 국회를 없앨 수는 없으니, 전문가와 경제관료들이 내놓은 정책에 대한 거수기 역할이나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측면이 더욱 도드라진다. 가령, 중앙일보는 4월 2일자 사설에서 “사드처럼 고도로 전문적인 군사적 사안에 국방위원회도 아니고 ‘일반적인’ 전체 의원들이 당론 비슷한 걸 정하는 게 바람직한 의사결정 과정이냐”며 “사드는 국회 입법이 아니라 행정부의 정책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 주장처럼 국회의원조차 사드 배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없다면 평범한 시민들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에서 논의 중인 해외파병법도 마찬가지다. 이 법률의 목적은 해외파병시 매번 국회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도록 파병 범위를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정치위기에 대한 반동적 대응
유승민 사퇴 직후 김무성 대표는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 중 하나는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소수 독재가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거론한 바 있는 “합의의 정치”라는 자유민주주의적 이상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실상 불가능함을 선언한 셈이다. 국가의 정책적 자율성 축소가 국회의 정치적 무능을 낳고, 국회가 무능해질수록 행정부의 독단과 기술관료의 우위가 확립되는 경향이 또다시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양산된 정치위기에 대응하는 반동적인 보수정치의 현주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