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8 제7호
2015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의 권리찾기
2015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풍경
88올림픽 이후 구로공단에도 부동산 재개발의 압력이 일었다. 지대 상승과 수출 부진으로 수익성이 떨어지자 구로공단 기업들은 해외로 공장을 옮기거나 아예 부동산임대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기존 입주기업들은 부동산 매각을 통한 시세차익을 챙겨 떠나기 시작했고, 새로 입주한 기업들은 대규모 아파트형 공장을 건설하고는 부동산 임대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그렇게 들어선 아파트형 공장에는 제조업이 아니라 IT기업을 필두로 하는 기업지원 서비스 기업들이 들어섰다. 2000년, 정부는 이런 변화를 독려하기 위해 구로공단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도권으로 납품해야 하는 일부 제조업 기업이 진입하기도 했지만, 시장의 변동과 높은 임대료는 3~5년 사이 이들을 떠나게 했다. 제조업 기업만이 아니라 IT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콜센터 등 새로운 서비스업체들이 들어서기 나타났다.
2단지는 아예 상업지구가 되었다. 구로동맹파업의 상징이었던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자리에는 봉제공장이 아니라 의류 판매·아울렛 시장(현대 아울렛, 마리오 아울렛)이 들어섰다. 정부는 이를 규제하기는커녕 관련 규정을 고쳐 용인했다. 국가산업단지 기능은 훼손되었지만 입주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 혜택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시장
1990년대, 해외공장으로의 이전이나 기술혁신을 도모하기 어려운 중소기업들은 생산조직의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려 했다. 영세사업장(혹은 가내사업장)으로 하청을 확대하거나 경기도의 대기업 공장의 하청을 따오는 방식이었다. 봉제업은 전자의 유형을 따랐고, 전자산업은 후자의 유형을 따랐다.
하청의 확대를 통한 비용절감 노력은 저임금 노동력 시장의 확대를 전제해야 했는데, 기혼여성노동력 시장과 산업연수생제도를 통한 이주노동력 시장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구로공단의 노동시장은 급격히 변화했다. 20대 여성노동자에서 40대 기혼 여성노동자로 노동력 공급의 중심 세대가 바뀐 것이다.
2000년대, 기업지원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게 늘고, 유통업이 확대되면서 20~30대 노동력이 크게 증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노동시장의 성별화된 양상이 나타나는데, 콜센터와 계산원 등 단순사무직과 판매직에서는 저임금의 40대 기혼 여성노동력을 활용하려는 경향들이 강화되어서다.
구로공단 입주기업의 잦은 변동(높은 자본 이동성)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더욱 가속시켰고,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반(半)실업상태의 노동자들은 점점 늘어갔다. 사업주들은 이런 상황을 지렛대 삼아 노동자들에게, 일 마무리하고 퇴근하라며 업무 종류 시간 이후의 ‘무료노동’을 강요했다. 이름만 달랐을 뿐 1980년대 무급노동이나 2010년대 무료노동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구로지역 노동조합운동의 오늘
이러한 사정들은 제조업에 기반을 둔 금속노조가 어떤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는지 쉽게 짐작케 한다. 2000년을 지나면서 구로지역 노동조합운동을 대표했던 수많은 노조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공단에서의 자본철수는 곧 노조와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몇몇 노동조합만이 기업이주지로 함께 이동할 수 있었다. 2009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의 노조 조직률은 0.2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1995년에 비해 노동인구는 3배나 늘었지만,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한 결과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민주노총 남부지구협과 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지역사회단체들은 지역주민들과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옹호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전개한다. 이때 형성한 신뢰에 기반을 두어, 노동조합과 지역사회단체들이 (정파를 떠나) 노동조합 조직확대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한다. ‘노동자의 미래’라는 연합체를 결성해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나선 것이다.
민주노총 2기 전략조직화 사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 활동은, 제조업 공단에서 노동조합 조직화사업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아울러 사업주 대표와 고용노동부 지역지청장을 상대로 근로기준법 준수협약을 이끌어 냄으로써 노동표준 확대를 통한 조직화 사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조직확대 사업은 노동조합운동의 기본이라는 점을 신규 조합원들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조직문화혁신의 가능성도 일정하게 보여주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의 고용 불안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자본이 빈번하게 이동하고 반실업상태의 노동자 비율이 높은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근속년수 1년 미만 노동자 비중은 2011년에 47.3퍼센트나 되었고, 2015년에도 41.9퍼센트나 된다. 근속 1년 미만 노동자 비율이 지난 4년 동안 절반에 가까운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불완전한 취업상태의 노동자 비중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구나 전자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비중의 감소는 (2011년 21.5퍼센트→2013년 19.0퍼센트→2015년14.9퍼센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존재하는 전자산업 하청기업의 생존비율과 관련되어 있다. 몇몇 휴대폰 부품업체들이 폐업하고, 생산물량 급감에 따라 일부 라인의 작동이 중단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전자산업 노동자 비중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취업과 반실업을 반복하는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이런 전망에서 보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의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은 기존 제조업 노동자 조직화 지원방안과는 다른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일자리가 안정되어 있지 않고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근속에 따른 성과임금의 분배보다, 근로계약을 맺고 퇴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임금협약이나 체불임금 정산에 대한 권리를 강화하는 게 더 긴요하다. 노동시장 진출입이 잦은 노동자들에겐 표준적인 임금협약(금속산업 최저임금)과 고용협약(고용승계)을 둘러싸고 지역사회에서, 공단사업주들과 표준근로계약을 맺는 활동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동시에 언제 어떻게 중장기 실업상태로 전락할지 모르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노동조합이 선제적으로 기획해야 한다. 권고사직이 일상화되고 있고, 고용유지지원금을 받고도 무급휴직을 종용하는 사업주들의 행태를 제어할 수 있는 기획들이 필요하다.
신규 업종 노동자의 자기 조직화
고용유연성이 높은 지역일수록 신규 업종의 진입도 용이하다. 필요로 하는 저임금 노동력을 확보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경우 의류봉제업이 의류 판매업이나 아울렛 업종으로 변모한 경우가 많다. 아울렛 업종에서 노동자에 대한 현장 규율은 물론, 지역사회에서의 영업 규정까지 모든 게 새로 구성되어야 한다.
IT업종이 빠져나간 자리는 콜센터 등(정보통신 인프라망을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지원 서비스업이 들어선다. 콜센터는 협소하고 비좁은 밀폐된 노동조건, 반복되는 인권침해 등 많은 문제를 낳고 있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영업규제가 필요하다.
양자 모두 지역사회의 개입과 함께 새롭게 형성된 노동시장에 대해 새로운 규범을 요구하면서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돕는 방안이 필요하다. 자본의 변화 속도만큼 노동조합 활동도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 권리찾기사업의 도전
신규업종에서 노동시장규율, 현장규율에 대한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 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의 자기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 등은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이 새롭게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이 실험은 경제 침체 국면에서 어떻게 노동조합이 자기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반실업자 층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노동조합 활동은, 노동권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노동조합 운동의 재건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의 노동자 조직화는 이런 차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제조업에서 판매업으로, 출판업이 교육업으로 변모하는, 제조업의 다양한 사업변모에 맞서는 노동조합 역시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