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5/07 제6호
아플수록 복기하라
어린 시절 나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동네에 있는 기원으로 향하곤 했다. 그곳에선 미워하는 사람과도 바둑을 두어야 할 때가 있다. 한두 시간 동안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리 마뜩치 않지만, 묘한 오기가 생겨 집중력을 다해 두곤 했었다. 평소에 얄밉고 미워한 나머지 꼭 보기 좋게 이겨 울상짓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패배할 때다. 내가 아는 모든 수읽기와 꼼수까지 총동원해 두었는데도 이따금의 오판과 실수, 실력 부족으로 인해 깨지고 마는 것이다. 어느 날은 거의 이길 뻔한 나머지 쾌재를 부르며 약 올리던 판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승부욕이 강했던 나는 금세 울상이 돼 입을 다물고 내 앞에서 씨익 웃고 있는 저 자식이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랬다. 그리곤바둑을 마치고 지켜야 하는 예도 모두 잊어버린 채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원통할 데가 없었다.
어린 나이, 자존심이 강했던 나머지 ‘실패’를 현명하게 돌아볼줄 몰랐다. 그러나 바둑에는 자신의 패배를 돌아보는 진지한 방법의 역사가 있다. 바로 바둑이 끝나자마자 함께 시간을 내어 복기하는 것이다.
복기는 ‘두었던 바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두는 것’을 의미한다. 바둑의 진짜 교육적 효과는 바로 여기서 발휘된다. 몇 백 개의 돌을 머릿속에 외워 재현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자꾸 복기를 하다보면 별 문제가 아니다. 뼈아픈 패배에 가슴이 저리고 가끔 울기도 하지만 내가 두었던 바둑을 한 수씩 놓아보며, 실패를 곱씹고 돌아볼 때 비로소 실력이 늘기 시작한다.
이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승리한 싸움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자의 복기는 다음에는 이길 수 있는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운동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감추어진 역사와 주체를 낳았고, 전노협-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을 세웠으며,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오늘 우리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가 무너지고 난 뒤의 잦은 후폭풍들을 마주하고 있다. 패배하고도 한참동안 민중운동은 자신의 실패를 복기하지 못했고,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패착들에 연연하거나, 혹은 망각하고 원인을 다른 곳에 돌림으로써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전면화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노동자운동의 재생은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우리는 지난 실패를 곱씹으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오늘보다》 7월호는 민주노조운동의 단초를 마련했던 노동자 교육운동에 대해 돌아보았다. 지나온 역사를 복기하고, 놓치고 있던 것을 재차삼차 확인하는 것은 결코 놓쳐선 안 되는 과정이다.
바둑 고수들은 매일 그날의 바둑을 복기한다고 한다. ‘오늘’을 보는 것은 과거를 치열하게 돌아볼 때, 가능한 일이다. 《오늘보다》가 사회운동의 가깝거나 먼 과거들을 돌아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