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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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 제5호

두렵고 곤란한 질문과의 대면

황정은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

  • 박용진 사회진보연대 회원

나는 얼마나 유능한가. 혹은, 세계는 이토록 형편없고 개인들은 저렇게 불행한데 나의 이념은, 조직은 그리고 나의 노동은 도대체 무엇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 지난 겨울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이다. 


그 질문과 마찬가지로 내게 참 곤란했던 책을 한 권 소개하려한다. 근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인 황정은의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다. 


이 책은 예상할 수 없는 순간 구타가 시작되고, 보거나 만지거나 들을 수 없는 영역에서 ‘발아한 씨발됨에 노출된’ 아이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막막함에 갇혀 무력해진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오사카의 번화가 고급 백화점에서 목격한 여장 부랑자의 모습에서 소설의 주인공 앨리시어의 내력을 그려냈다고 한다. 


앨리시어는 누구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분노하기 시작한 엄마는 그와 그의 동생을 때린다. 지속적이고 가속되는 그녀의 폭주는 목과 머리,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어미가 경멸에 찬 욕설과 고막을 울리는 매질로 아이들을 모욕하는 사이, 한때 머슴이었던 늙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잠이 들었는지, 텔레비전을 보는지 모를 일이다.


앨리시어에게 이런 세계는 ‘씨발’이라고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불시에 자신에게 들이닥쳐 뼛속 깊이 아픔과 굴욕감을 남기는 이 모욕적이고 불쾌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반복.


이 소설은 독자를 불쾌하게 하는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앨리시어는 역겹고 두려울지도 모른다. 그 아이들은 품위 있게 아프거나 세련되게 처참할 수 없다. 아이들의 고통스런 삶 풍경을 감내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폭력’을 인식할 때 구체적이고 복합적으로, 또 곤란함을 피하지 않고 그 전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폭력은 실상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육체에 각인된 아픔이 두려움을 낳고, 그렇게 굴복에 길들어져 간 한 사람의 납득하기 어려운 내력이 형성된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과업이 자리 잡아야 하는 곳이다. 적어도 혁명은 앨리시어를 해방하고, 그의 엄마와 세계를 치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앨리시어가 또 다른 수렁에 빠지기 전에 우리는 좀 더 기민하고 동시대적인 감각을 지녀야 할 것이다. 


“앨리시어도 그대처럼 이 거리 어딘가에서 꿈을 꾼다 (…)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 그대와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

 

덧붙이는 말

'책 이어달리기'는 《오늘보다》의 독자들이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짧은 글을 쓰는 코너입니다. 글을 쓴 사람이 다음 호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목하는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다음 주자는 이상철 민주노총 강원본부 대외협력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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