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X정치
- 2015/06 제5호
없는 자의 분노가 애꿎은 곳을 향할 때
박정범 감독의 영화 <산다>에 대한 비판적 리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정철은 겨울이 되자 일터에서 쫓겨난다. 일이 없으면 겨우내 생존할 수 없는 그는 산골의 된장 공장에 들어가 구걸하다시피 일용직 일자리를 얻는다. 박정범 감독이 스스로 주연을 맡고 연출한 영화 <산다>는 하루하루 일당으로 먹고사는 주인공 정철을 통해 동시대 비정규직 노동자가 겪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약 5분간 정철이 산에서 나무를 베며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특별한 대사나 사건 없이 정철의 육체노동을 긴 호흡으로 담고 있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정철은 낫을 휘두르며 산에 길을 내고, 눈으로 뒤덮인 겨울 산을 기다시피 오른다. 그리고는 도끼질로 커다란 나무를 베어낸 뒤 그것을 질질 끌어 트럭으로 실어 나른다. 어두워진 산을 배경으로 쇠망치를 휘두르며 바위를 깰 때 정철이 내는 신음은 육체적인 고통과 감정적 분노가 한데 섞인 늑대울음처럼 들린다. 아침이 되면 괭이로 장작을 패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무한한 육체노동. 정철은 혼자서는 도저히 다 해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에게는 보살펴야 할 가족들이 있다. 정철은 산사태로 반쯤 쓰러진 집에서 정신질환을 앓는 누이와 누이의 딸을 돌보며 살아간다. 그는 지금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며, 훗날 가족과 애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살기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닥쳐있는 현실은 고통의 연속이다. 정철은 일하던 건설현장에서 임금을 날치기당한 데다가 돈을 빼돌린 범인으로 의심까지 받는다. 정철과 누이는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누이는 매번 공장을 도망쳐나간다.
이토록 불안한 정철의 삶 가운데서 그가 침묵과 함께 내보이는 표정은 흥미롭다. 거기에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과 분노가 뒤섞여 있다. 정철은 누나의 정신 질환에 대해 쑥덕거리는 된장 공장의 노동자들을 아무런 말없이 노려본다. 또한 그는 공장 사장의 예비 사위를 대접하는 장면에서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있는 힘껏 닭의 목을 내리치기도 한다. 새벽녘에 겨울 산에서 반팔 티셔츠 하나만을 입은 채 도끼를 휘두르며 나무를 베는 그의 몸동작 역시 대사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내면에 차츰 쌓여가고 있는 분노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정철은 누이와 조카를 묵묵히 돌보는 가장의 책임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내팽개쳐진 자신의 삶에 대한 음울한 분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배우이자 감독인 박정범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결국 노동자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겠냐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영화는 빈곤한 일용직 노동자의 자유롭지 못한 삶과 그러한 삶이 끝없이 반복되는 데에 분노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동자에게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강조하기 위해 다소 과장된 표현들을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턱 밑까지 막혀오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을 견뎌야 한다. 주인공 정철의 삶은 감독의 말 그대로 ‘비관적인 세계’ 속에서 그저 반복되다 아무런 변화 없이 끝나버릴 것만 같다. 영화 속 사건들은 정철을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철은 계속해서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는데 그때마다 그는 현실의 고통과 그에 대한 분노를 모두 자기 안으로만 받아들인다.
예를 들자면 된장 공장 노동자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온 젊은 인력에 비해 일의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상 이 상황을 조장한 이는 정철이다. 그는 건설현장에서 당한 것처럼 스스로가 부당 해고자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즉, 돈 앞에서는 강자의 편에 선 채 다른 사람을 짓밟는다.
정철의 태도는 고용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 경쟁에 내몰린 이들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자체를 정철 혹은 그와 비슷한 인물 개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정철의 힘없는 걸음걸이와 멍 한 채 입안에 맨밥을 우겨넣는 행동은 그가 이 상황을 옳다고 생각하거나 즐기고 있지 못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그의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불편함에 대해 러닝타임 내내 더는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정철은 자신이 벌인 상황 한가운데서 오로지 침묵하며 욕설이나 구타를 당하면서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사장이 시킨 거예요”라는 말만을 반복한다. 자본가의 억압이나 부당한 해고 통지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오로지 침묵할 뿐이며, 무엇이 이 비참의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는 노동자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 자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정철이 자신의 비참에 대한 분노를 자기 안으로 켜켜이 쌓아갈 때 영화는 노동자의 현실로부터 오히려 더 멀리 달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저 노동자라는 계급을 비참과 우울만으로 점철된,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무기력한 대상으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정철은 어느 순간 자기 안의 분노를 애꿎은 곳에 표출하기도 한다. 지친 채 밤길을 걷는 정철을 졸졸 따라오는 친구 명훈. 정철은 “가!”라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명훈은 그를 달랜다. “정철아, 화 좀 내지 마”, “넌 잘 모르겠지만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그러자 정철은 모든 애정도 희망도 다 모르겠다는 듯 명훈을 노려보며 그에게 가게에서 무를 훔쳐오라고 도둑질을 시킨다. “나한테 당장 필요한 것은 이런 거야.”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정철의 내면은 자신의 주변 사람과 손잡기를 포기한 상태다. 그는 애인의 일터에 가서 “난 왜 하나도 가질 수 없는 거냐?”라며 주정한다. 앞서 자신에게 손을 내민 명훈에게 퍼부은 애꿎은 분노는 그의 애인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철은 스스로 주변 사람을 배척하고 떠나가도록 자초한다. 동시에 우울과 비관 안에 자신을 가두어간다. <산다>는 노동자 영화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지만 ‘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라는 노동 현실의 한 단면만을 과장, 취합하여 노동자를 비극적인 ‘볼거리’로 만들어내고 있다.
없는 자의 분노가 가족과 친구라는 애꿎은 곳을 향하자 그의 주변으로 어두컴컴한 적막이 내려앉는다. 정철에게 남은 것은 오직 조카와 집 나간 누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는 것뿐이다. 이렇게 영화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싶다’는 소기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이를 노동자의 현실이라고 생각할지 의문이 든다.
영화 제목인 “산다”는 삶이라는 ‘생동’과는 정반대로 들린다. 그것은 영화 내내 긴 이야기를 꺼내는 일 없이 단답형으로만 툭툭 질문하거나, 대답하는 말투의 정철이 내뱉는 신음과 한탄처럼 귓가를 맴돈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아무런 말(불만)을 꺼내지 않기를’, ‘볼일을 다 보면 (필요가 없어지면) 말없이 사라져주기를’ 요구한다. 이 영화가 그리는 노동자는 마치 자본가가 바라는 모습을 내면화한 기계와 같은 모습이다. 그 때문에 정철이 ‘산다’라고 탄식할 때, 그가 말하는 ‘산다’의 의미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가깝게 들리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