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보다
- 2015/06 제5호
좌충우돌 초보노조 출판노동자의 도전
체념에 맞선 3년의 실험을 돌아보다
5월 12일 서교동 ‘인권중심 사람’ 2층 강당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1년 간 준비하고 실행해온 출판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온전히 공개하는 자리였다. 발표가 시작되고 한참 뒤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강당 안으로 입장했고, 이런 예측하지 못한 ‘사태’(?)는 주최 측을 당황케 했다.
참석자들의 자유 발언도 뜨거웠다. 연봉 협상 때마다 출판산업 위기를 운운하는 회사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 해고를 통보하면서 6개월짜리 계약직 계약서를 내밀던 어처구니없는 회사의 태도 등 그간 술자리나 사석에서 신세 한탄과 함께 들을 수 있었던 출판노동자들의 속사정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미리 섭외한 다섯 명의 패널들이 무안할 정도로 많은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대체 이런 자리를 얼마나 기다려왔길래!
출판산업 노동시장의 오늘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자료에 따르면 일반단행본을 출간하는 업체의 출판노동자의 수는 약 1만 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현재 200명 정도만 출판노동조합협의회(출판노협)에 가입이 되어 있으니 출판산업의 노조 조직률은 약 2퍼센트에 불과한 상황이다.
출판노동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대에서 30대 사이의 노동자가 93퍼센트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평균 근속년수는 3.1년에 불과하다. 2014년을 기준으로 전체 고용인구의 평균근속년수가 5.6년인 것과 비교하면 출판산업의 근속년수는 평균의 반 토막 수준인 것이다. 성별 구성을 보면 여성 77퍼센트, 남성 23퍼센트로 정도로 여성노동자 비율이 남성노동자보다 세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40대 이상 노동자의 비율이 6퍼센트로 이전 연령대에 비해 급격히 낮아지는 양상도 특이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의 노동자들이 퇴직을 하고 1인 출판사를 차리거나 외주노동자로 유입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런 양상은 쉽게 이해된다.
낮은 근속년수와 낮은 평균 연령, 높은 여성노동자 비율 등은 결과적으로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을 위한 토대가 된다. 전체 응답자 501명 중 77퍼센트에 해당하는 출판노동자들이 ‘부당해고 문제 같은 출판노동자 생존권 문제 해결해달라’고 답한 것도 이런 현실과 맞닿아있다. 실태조사에서 자신의 고용계약을 ‘정규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94.8퍼센트로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출판산업에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외주노동자라는 비정규직 노동시장이 1만여 명의 재직 노동자들과 별도로 존재하고 있을뿐더러 사업장에 고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권고사직의 형태로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균 연령이 상당히 낮음에도 불구하고 한번이라도 이직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61.3퍼센트였고, 이 가운데 3회 이상 이직을 했다고 응답한 비율도 23.8퍼센트나 됐다.
자기최면과 체념을 넘어
얼마 전 발생한 자음과모음 출판사 부당전보 사건 역시 이러한 출판노동의 맥락 속에 놓여있다. 사건 당사자인 윤정기 조합원은 사내에서 논란이 되었던 CCTV 설치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등 양심에 따라 자신의 의사를 표명해왔다. 그러자 회사는 윤 조합원에게 권고사직을 권유했다. 이를 거부한 그는 얼마 후 파주의 물류창고로 발령이 났다. 자음과모음은 이 전보가 회사의 인사권 행사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연 권고사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던 편집자를 경기도 파주 소재의 물류창고로 발령내는 것이 정당한 인사권 행사로 볼 수 있을까? 경영상의 위기가 없어도 상사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갈등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나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출판계 분위기고, 많은 노동자들 또한 이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내면화한 상황이다. 만약 윤 조합원이 회사의 권고사직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역시 해고를 경험한 수많은 출판노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됐을 것이다.
사실 이직과 해고가 만연한 출판계에서 다른 팀으로의 발령쯤이야 이렇게 난리를 칠 일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이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일부 출판노동자들조차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싸움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 사건이 여론의 관심을 모을 만한 사건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출판노동의 곤란이 있다. 영세사업장들이 많고 매출은 자꾸 떨어지고 출판산업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니 출판노동자들은 회사의 요구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스스로 체념한다. 경제가 어려우니 국민들이 일방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비슷할 것이다. 현재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를 비롯한 출판노협 조합원들이 이번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출판노동자들의 자기최면을 깨기 위해서다.
좌충우돌, 그러나 두근거렸던 3년
10개의 지부와 분회로 구성된 출판노협은 출범한지 3년이 채 안 되는 신생 단위들이 과반 이상이다. 그 중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는 서울수도권 지역에 사업장이 밀집되어 있는 출판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2012년 9월에 출범된 노동조합이다. 신생 노조답게 집행부 역시 그 경험이 짧고 집행부원들 중에서도 전통적인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솔직히 답답함을 느낄 때도 많다. 미조직 노동자 상담에서부터 조합원 교육 같은 일상 사업과 집회 준비까지 경험이 전무하다보니 잔뼈 굵은 활동가들의 조언이나 노하우가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직은 상근자도 없고, 독립된 사무실도 없으니 이런 열악한 조건은 얼마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3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경험 부족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경험이 없다보니 관성도 없어서 사안에 민감하게 대처하게 된다. 우스갯소리로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상황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부족한 경험을 채우기 위해 최대한 조합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고민해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한다. 기존의 노동조합운동이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 것에 비춰보면 출판노조는 오합지졸 그 자체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이 전통적인 기업별 노조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젊은 출판노동자들을 모이게 할 수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산별노조를 만들 수도 없을 게다. 어차피 모든 것을 새로 써내려가야 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글자, 두 글자 제대로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지만 단단한 목표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에게 최우선 목표는 출판산업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공동의 단체협약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출판산업에 종사하는 전체 재직노동자 수는 1만여 명 수준으로 대기업 하나의 직원 수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 지역에 밀집해있어 노동자들 간에는 같은 ‘출판동네’에서 일한다는 동료 의식도 있고, 점조직 같은 느슨한 네트워크도 형성되어 있다. 이런 조건들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지역별 산별노조로 가는 단초가 될 수는 있다. 공동단협을 마련하고 이것을 각 사업장에 적용하도록 싸우는 과정을 통해 출판산업의 노동기본권을 쟁취하는 것이 목표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노동조합 내부의 조직력은 물론이고 저자-독자-출판노동자들을 잇는 공동의 전선을 마련하고, 정부 예산을 받아 운영되는 유관 기관들과 연계하는 등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새로운 실험과 함께
노동조건과 직결되는 단체협약 체결이 노동조합 활동에 있어 선결과제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 명확해지지 않은 또 다른 요소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다. 아직은 이에 대해 뚜렷한 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 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세 달 전 출판노협의 상시기구로서 여성위원회 준비모임이 시작됐다. 아직은 준비모임 단계이기 때문에 방향성이나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여전히 논의 중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모인 날 어느 여성조합원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출판노조에 가입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만약 그때 여성위원회가 있었더라면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거 같아요.”
노조 가입이 자신의 근로조건을 당장 개선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협도 맺지 못한 신생 노조에 가입서를 내밀 게 만든 건 대체 뭐였을까. 앞으론 또 무엇이어야 할까.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공동체적 경험과 관계맺음이 이루어지는 도심형 젊은 노동조합, 출판노협의 미래에 새로운 실험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가슴 벅차는 모험을 더 많은 출판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