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는글
- 2015/06 제5호
말하기를 그만두면 안 된다
사촌오빠가 취업했다. 예능 프로그램 조연출을 때려치우고 우유배달을 하며 지낸 지 몇 달 만이다. 어느 기업 회장의 운전기사 일을 소개받아 하게 되었단다. 근데 웃긴 건 운전기사를 하며 보고 듣는 일들만이 아니라 ‘그 기업 회장이 누군지(그러니까 일하는 그 회사가 어딘지)’도 발설해선 안 된다는 거다. 비밀요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운전기사는 ‘갑’들이 보이는 우스꽝스럽고 치졸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는 직업 중 하나다. 운전기사의 폭로로 기업 회장이나 국회의원의 치명적 비리가 밝혀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그들만의 게임, 그 사정들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세히 알 길이 없다. 증권가 찌라시 같은 ‘풍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를 접할 뿐이다.
종영을 앞둔 SBS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는 대형로펌 ‘한송’의 대표 한정호(유준상 분)를 필두로 하여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행태를 코믹하게 그리는 블랙코미디다. <풍문>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른 재벌 소재 드라마에선 엑스트라로만 등장하는 비서, 집사, 가정부, 가정교사, 보모와 같은 이들이 중요한 조연으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각각의 캐릭터와 사연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는 드라마에 빠질 수 없는 재미다.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있을 것 같은 ‘비서들’ 사이에서도 입장은 제각각이다. 사모님을 곁에서 모시는 이비서는 집에서 일하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에 가담한다. 재빠른 판단과 능글맞은 여유로 한정호를 쥐락펴락하는 양비서는 숨은 실세다. 친오빠를 통해 한송과 관련된 계약직 노동자 관리 회사인 한트러스트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며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가 틀어진다. 어수룩하고 우유부단한 김비서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스파이 역할을 한다. 민비서는 오빠가 노조 활동을 하며 한송의 비리에 맞서다 누명을 쓰고 폐인이 된 개인사 때문에 한송과 법적으로 싸우려는 각오로 몰래 사람을 모은다.
현실에서 우리의 처지는 그 비서들을 포함한 (한정호의 표현에 따르면) ‘가신들’에 가깝다. 더러운 꼴 다 보고 들으면서도 ‘이 집을 나가서 내가 뭘 하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고, 반항을 시도해보다가도 금방 돌아와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것이 그렇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의 ‘주인’으로 사는 방법을 잊어가고 있다. 노동조합과 같은 집단행동은 가장 유력한 모델이긴 하지만 아직 많은 이들에게 그것은 멀고 어렵고 두려운 것에 불과하다. 노동조합만으로도 충분하지는 않다. 노동조합을 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첫 번째 투쟁을 하는 경험은 분명 내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짜릿한 단절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질 수많은 ‘현실적’ 문제들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지가 진정 주인됨의 조건이 아닐까. 몇 차례 ‘노조 할 권리’ 코너를 연재하면서 드는 고민이다.
명쾌한 답은 없다. 그렇지만 <풍문>의 이비서가 그러더라. 말해봐야 답 없는 문제라도 말하기를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단결의 묘안을, 삶의 비전을 나눌 수 있는 잡지가 되도록 <오늘보다>의 말하기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