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5 제4호
일자리를 둘러싼 세대전쟁은 사기다
‘노동시장을 개혁해야 청년일자리가 해결됩니다.’ 고용노동부가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를 불러내 만든 광고 문구다. 선거철도 아닌데 지난 몇 달 새 정치인들이 ‘청년’을 들먹이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그 말들이 향하는 곳은 청년이 아닌 중장년층 노동자들이다. 정년연장과 맞물린 임금피크제, 성과급·직무급 확대, 해고요건 완화 등을 실시해야 기업에 청년 고용의 여력이 생긴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다.
‘정규직 이기주의’는 정부가 노동조건의 후퇴를 요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꺼내드는 카드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세대 간 갈등의 프레임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이라는 우익 청년단체는 정부와 발맞춰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노총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외쳤다. ‘좋은 일자리 독점하지 마세요!’
박근혜 정부 들어 고용률이 일정 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취업자 증가는 대부분 고령층이나 기혼 여성 중에서 발생했고 청년 고용률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3월 기준 전체 고용률(15~64세)은 64.9퍼센트인데 청년층 고용률(15~29세)은 40.0퍼센트에 불과하다. 정부로선 청년고용 문제의 해결 없이 ‘고용률 70퍼센트’라는 목표 달성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안을 통해 가능할 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세대 간 일자리 전쟁’이란 눈속임
사실 ‘세대 간 일자리 전쟁’이라는 가정은 국제적으로 이미 유효성을 상실한 논리다. 1994년 OECD 일자리전략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고령층 조기퇴직을 권고하였으나 10여 년이 지나도록 청년실업 문제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걸었다. 둘 사이에 이론적, 실증적 연관성이 없다는 판단과 함께 이러한 권고사항은 2005년 OECD 신일자리전략에선 폐기되었다.
한국 상황을 바탕으로 “고령층 고용은 청년층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검증한 연구(안주엽, <세대 간 고용대체 가능성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2011) 역시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이 연구에 따르면 첫째, 실증적으로 고령층 고용과 청년층 고용 간에 부(-)의 상관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통계에 따르면 청년이든 고령층이든 고용률·실업률을 좌우하는 변수는 경제성장률이고, 특히 청년 고용률·실업률은 경기순환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둘째, 고령층 또는 준고령층과 청년층 사이의 직종분리 때문에 세대 간 고용대체보다는 보완의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에 진입하기 어려운 이유를 정규직 노동자로부터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인과관계 설정이다. 파견, 기간제, 시간제, 인턴 등의 예외 조항을 마련해 기업이 손쉽게 노동자를 쓰고 버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역대 정부의 노동정책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러한 정책을 십분 활용하여 인력을 쥐어짜며 경영을 해 왔다. 이런 흐름에 대한 규제, 역전 없이 정규직으로의 신규채용이 늘어날리 만무하다.
세대 간 고용이 대체 가능하다는 주장의 근본적 오류는 전체 일자리의 수, 전체 임금의 수준이 고정되어 있다는 가정이다. 아버지 세대가 청년 세대에게 양보를 해야 하니 어쩌니 하지만, 결국 기업은 ‘정규직들이 이거 안 받아들이면 신규채용 안 하겠다’라고 버티며 손에 쥔 것을 단 하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하락해야만’ 추가적인 고용이 가능하다는 단서조항도, 그것이 ‘하락하기만 한다면’ 기업이 지금보다 청년 고용을 늘릴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눈속임이긴 매한가지다. ‘정규직이 양보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건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정부와 기업이 노동계를 공격하는 한결같은 논리였지만 그것은 항상 전체 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로 귀결되었다.
청년들의 눈높이 ‘강제로’ 낮추기
불황기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기업과 청년들의 선택이 정반대를 향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기업은 ‘경력직’,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자연히 청년일자리의 규모는 감소하고, 질적 수준은 악화된다. 중소기업의 경우엔 정규 신입사원을 아예 뽑지 않고 필요한 시기에만 인턴 또는 경력직 알바를 채용해 운영하는 회사도 많다.
같은 조건 속에서 청년들은 더욱 강하게 ‘안정적 일자리’를 선호한다. 2000년 이후 청년실업률의 상승은 둔화되었지만 청년고용률의 하락은 매우 급격하다. 이는 곧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가능한 한 좋은 일자리로 진입하기 위해 대학 진학 외에도 교육 기간과 비용이 무한정 늘어나는 일(취업 준비를 위한 휴학, 외국어 공부, 각종 고시나 자격증 시험, 대학원 진학 등)이 일반화된 지 오래다. 실망실업자(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취업 가능성을 낮게 보고 구직 자체를 포기하는 것) 효과와 이직률도 20대가 특히 높은 편이다.
질 좋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 길게는 30대 초중반까지의 청년들이 실직과 구직을 반복하고 있다. 이 사태에 대한 익숙한 대답은 ‘눈높이를 낮추라’는 것이다.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통해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 진입의 기회가 활짝 열리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하게 강제로 청년들의 눈높이를 낮추는 방안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도 더 유연하게(임금피크제, 직무급, 성과급), 고용도 더 유연하게(해고요건 완화) 바꿔 남아있는 좋은 일자리의 조건마저 아래로 끌어내리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가 너무 적다고 했더니 ‘좋은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답하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안은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격이다.
허구적 청년 담론을 끝내자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는 ‘청년 없는 청년담론’의 위험성을 목격하고 있다.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청년층의 표를 끌어오기 위한 말잔치가 벌어졌다면, 지금은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청년’이라는 이름이 활용된다. 청년 세대는 열악한 조건에 처해 있으나 가장 조직되어있지 않은 주체, 말하지 않는 주체, 그래서 멋대로 끌어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되는 집단이 되어버렸다.
결국 청년들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고, 집단적인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이 사태의 유일한 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아직 미미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불안정하고 분산된 노동조건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청년들이 너무 무기력해서, 현실에 안주하거나 달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청년들의 정치적 주체화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것은 그것이 세대의 이름으로는 불가능한 기획이기 때문이다.
지금 청년들은 취업이냐 실업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로 포괄되지 않는 수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 어렵사리 대기업에 들어간 신입사원들은 ‘과보호 좀 받아봤음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보장받는다는 이유 때문에 장시간 노동과 부당한 요구, 모욕적인 대우에 저항 한 번 못 하고 산다. 청년들이 포진한 다양한 비정규직 업종 중에서도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생산직·서비스직의 경우 열악한 노동환경과 고용불안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이들 앞에서 ‘눈높이를 낮추라’, ‘편하게만 살려 한다’는 말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단일한 문제를 지닌 집단이라 말하기에 청년들은 각자의 학력, 지역, 지향, 운 등에 따라 다양한 현실을 맞닥뜨려 그 속에서 싸우거나 좌절하고 있다.
무엇보다 ‘불우한 피해자 세대’라는 자기 정체성은 청년들의 정치적 주체화보다는 보수화에 훨씬 많은 기여를 하며,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청년 담론의 유행과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우익청년단체들과 그들의 활동이 이를 반증한다.
최근 케이블 비정규직, 통신사 비정규직, 삼성전자서비스, 면세점 판매직,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 등의 노조 건설 사례는 20~30대 청년세대가 밀집된 산업·직종에서의 집단적 조직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기력과 두려움을 넘고 동료의 손을 잡을 때,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서 시작해 시대의 문제를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청년들의 현실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청년뿐만 아니라 대공장·정규직·남성으로 표상되는 현재의 노동자운동에게도 시급한 과제다. 그러지 못한다면 미조직된 청년세대를 빌미로 한 공격 앞에서 매번 무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