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2015/05 제4호
노동운동, 분절된 현실을 응시하라
1980년대 이후 노동시장 변화와 노동자 투쟁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이슈다. 정부는 대기업,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과잉보호를 문제로 지적한다. 이중구조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상향평준화보단 대기업 정규직 처우를 낮추는 하향평준화를 택하겠단 이야기다. 물론 정부 정책은 실제로 임금격차 해소와 일자리 만들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의 현재 상태를 고수하는 것도 대안은 아니다. 한국의 임금격차가 너무 심각한 탓이다. 노조 조직률은 낮고 법은 있으나마나 한 탓에 대기업, 공공부문 노동운동이 현 상태를 지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격차를 확대한다. 이는 다수 노동자가 노동운동을 기득권의 수호자로 인식하게 만들어 노동운동의 계급적 대표성을 크게 약화시킨다.
30년간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그렇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지난 30년간의 노동정책을 분석해보며 노동운동이 어떻게 계급적 단결을 위한 길로 나갈 수 있을지 살펴보자.
1980년대 한국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은 원활한 노동력 공급과 노동조합의 억제였다. 1970년대의 고도 축적과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3저 호황은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가져왔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 정부가 신경 쓴 것은 노조 억제였다. 1980년 신군부는 노동법을 개악해 초기업노조를 불법화하고, 3자개입 금지, 정치활동 금지로 노조 확산을 막았다. 폭발적 수출 증가로 수출대기업은 큰 부를 축적했지만 분배 요구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공돌이 공순이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었다.
3저 호황 한복판에서 분출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지체된 분배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 조직률이 14퍼센트에서 23퍼센트로 급상승했고, 1990년까지 임금도 매년 두 자릿수로 인상 됐다.
하지만 노조법 개정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특히 문제가 된 건 초기업노조를 불가능하게 만든 조항이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부터 전노협까지 지역연대를 기반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했지만 자본은 철저하게 기업별 노조 체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수직적 원하청 관계를 비용 경쟁력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수출 재벌에게 산업별 노조와 같은 초기업노조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결국 제도 장벽과 정권의 탄압 속에 대기업 노동운동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사업장 협약을 발전시켜나가며 기업별 노조체계를 공고히 했다.
1990년대부터 1997년까지 정부의 핵심 노동정책은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유연화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총액임금제를 실시하고, 호봉제를 직무직능급으로 바꾸는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했다. 김영삼 정권은 1996년 크리스마스에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를 담은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3저 호황이 끝난 1990년대 초부터 한국 자본주의의 이윤율은 하락추세로 반전되었고, 재벌들은 이윤율의 감소를 자본투자의 확대로 상쇄해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다.
유연화와 노동운동 분할, 배제
하지만 재벌의 부실과 금융시장 개방은 경제 위기 사태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진행시켰고, 결국 1997년 겨울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곧 압축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몰아닥쳤다. 민주노총은 1996~97년 총파업을 통해 날치기 된 노동법을 유보시키긴 했지만 1998년 결국 파견법을 포함한 노동시장유연화 정책들을 받아들였다.
1998년부터 최근까지 정부의 노동정책은 유연화와 노동운동에 대한 분할, 배제로 요약된다. 정리해고제에 따라 2000년대 초반까지 구조조정이 계속되었고, 아웃소싱이 합리화되며 간접고용이 산업 전반에 일반화되었다. 파견근로가 가능한 업무를 규정한 파견법은 아웃소싱의 합리성을 법적으로 부여했지만 실질적 규제 효과는 없었다.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현대차 불법파견이 대표적 예다. 2006년에는 유연화된 노동시장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비정규직보호법이 제정되었다.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온전한 의미의 국민경제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출대기업들은 과잉투자로 발생한 1990년대의 부채를 공적자금으로 털어냈고, 미국, 중국 경제의 활황에 힘입어 수출이 급증하며 이윤율을 회복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의 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재벌의 성장이 국부(國富)와 하청기업들의 희생, 최종적으로는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시대 성장법칙은 커진 파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의 파이를 뺏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수 노동자를 저임금 상태로 묶어두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이 구조의 요체였다.
노동운동의 일부를 분할해 포섭하려고 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달리, 이명박 정권은 간접적 방법이 아니라 정공법으로 민주노총의 전투성을 약화시켰다. 이명박 정권은 복수노조법과 전임자임금지급금지법, 그리고 노조탄압 전문컨설팅 업체들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민주노총의 사회운동성을 봉쇄시켰다.
코포라티즘적 지향과 전투적 조합주의 사이를 오가는 좌충우돌, 그리고 사회운동을 봉쇄하는 제도 개악 속에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이 택한 건 기업별 협약의 강화였다. 대안이 부재한 상태에서 조합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기업별로 생존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 정권의 코포라티즘적 태도와 수출대기업의 성장 속에 공공부문·재벌대기업 노조들은 꽤 높은 수준의 임금협약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힘 있는 대형 노조들이 사업장으로 퇴각하자, 민주노총의 사회적 힘과 계급적 대표성은 더욱 약화됐다.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노조들의 어려움은 증가했고, 법과 노조로부터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다수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특권으로 비춰졌다. 민주노총이 잘 싸우면 임금, 노동조건 격차가 오히려 더 커지게 되는 역설도 발생했다.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표준?
박근혜 정부 노동정책의 핵심은 고령화 대책과 새로운 정상성의 구축이다. 노동시장 정책만으로 노동운동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 탓인지 특별한 노사관계 정책이 보이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고령화 속도가 빠르다. 박근혜 정부 임기 중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노동력 감소와 부양인구 증가는 경제성장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연공급을 없애야 기업 부담 없이 정년을 연장할 수 있고, 기존 노동자들의 해고를 수월하게 만들어야 신규 취업자에게 일자리가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아랫돌 빼 윗돌 괴는 대책이지만, 고령 세대와 청년 세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처럼 포장한다.
정부와 자본이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건 구조개혁의 장기적 효과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진행되더라도, 지금까지는 노동시장의 정상적 표준이 정규직, 호봉제 등 1987년 투쟁의 성과물들이었다. 그게 정상이고 나머지는 비정상이었던 상황이었는데, 이제 이 정상성의 기준을 아예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정권 의도대로 된다면 앞으로는 비정규직이 정상이고, 하는 일이 아니고 자본이 얻은 수익에 따라 임금을 받는 것이 정상이 될 것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나쁜 일자리로 불리던 일자리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이런 노동시장의 하향평준화는 장기불황이 예상되는 세계경제 정세에서 수출재벌의 직접적 이해관계에도 매우 중요하다.
2000년대 노동시장 유연화로 전체 경제의 노동소득분배율은 낮아졌다. 하지만 산업부문(광업, 제조업, 전기가스수도업)의 경우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50~60퍼센트에서 변동했을뿐, 평균 수치가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저임금 비정규직을 확대했지만, 수출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이 그만큼 올랐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단적으로 2004~14년 동안 기간제 노동자의 연평균 임금은 1400만 원에서 1900만 원으로 36퍼센트 상승(<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했지만, 현대차의 연평균 임금은 4900만 원에서 9700만 원으로 100퍼센트 상승(<현대자동차 사업보고서>)했다. 산업부문의 노동소득분배율이 크게 하락하지 않았지만 대신 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커진 것이다.
단결을 위한 전략
한국의 노동시장 정책은 철저하게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출대기업 중심 경제인 탓에 재벌의 요구가 정부를 통해 제도로 곧바로 확립되었다. 정부는 초기업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를 강제했고, 대기업 노동운동이 체제에 도전하는 급진적 노동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밀어붙이며 지불능력 되는 사업장의 힘 센 노조만 살아남도록 노동시장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 노동시장 구조개혁으로 마지막 울타리마저 부숴 1987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새로운 표준을 만들려고 한다.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이래 투쟁을 멈추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자본의 전략을 거스르진 못했다.
민주노총은 이런 점에서 구조개혁에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노동자 대중의 전체 이해관계를 조직할 수 있는 대안적 요구를 만들어야 한다. 전 산업적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직무와 숙련에 관한 조사가 필요하고, 노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표준적 임금액이 제시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장기불황 속에 취업자와 실업자가 연대할 수 있는 일자리 정책도 있어야 하며, 노동자 간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다양한 연대전략이 필요하다. 고령노동자의 노후와 기금의 생산적 활용을 위해서 연금 전략 역시 중요할 것이다.
1987년 대투쟁 이래 지금까지 우리 민주노조운동이 가장 취약했던 것은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한 전략적 투쟁과 요구들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에게 진정한 성과는 노동자의 확대되는 단결뿐이다. 민주노총 4월 총파업을 시작으로 단결을 위한 대장정을 시작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