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5/04 제3호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본 소득불평등

최근 논쟁에 대한 비판과 대안

  • 노동자운동연구소 소득불평등 연구팀
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소득격차가 1980년대 이래 계속 커지고 있다는 점, 특히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더욱 커졌단 사실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소득격차 확대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 미국 오바마 정부가 1퍼센트 부자 증세와 중산층 경제를 정책으로 내세워 소득불평등 논쟁은 담론 수준이 아니라 실제 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으로 확대된 상태다. 한국에서도 정부와 야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소득불평등 문제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고 있다.
 

 

논쟁의 기본구도: 분배냐 성장이냐

최근 이야기되는 소득불평등 관련 논의는 대부분 분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2000년대 들어 가장 활발하게 소득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조셉 스티글리츠와 같은 케인스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소득격차가 정당한 시장 경쟁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성장을 방해하고 다수의 행복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스티글리츠는 특히 지대추구가 문제라고 비판하는데, 그가 정의하는 지대추구는 한 일이 아니라 소유권(또는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상을 바라는 행위 일반을 지칭한다. 이런 지대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쪽은 손해를 본다. 국가자산을 공정하지 못한 가격에 장악하는 행위, 정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서민들을 금융상품으로 약탈하는 행위, 직간접적 독점권을 이용해 시장에 신규진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행위 등이 지대추구 행동들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수년째 밀고 있는 임금(소득)주도성장론도 최근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한국의 양대노총과 민주당이 모두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임금주도성장론은 상위소득자에게 유리한 국가 경제정책과 법제도가 소득 양극화와 임금 비중 감소를 가져왔고, 소득 감소가 소비 감소로 이어져 생산도 문제가 생기는 총체적 불안정성이 만들어졌다고 분석한다. 

수요 부족은 잠재적 성장에 영향을 미치고, 불안정한 성장은 또다시 임금을 감소시켜 소득 양극화를 크게 만든다. 수요 부족으로부터 발생하는 악순환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런 수요 부족을 만든 것은 최저임금 인하, 단체교섭 약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의 친자본적 분배 정책이다. 

시장근본주의적 경제학(신고전파)은 전통적으로 성장을 강조해 왔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경제학자인 필 그램은 스티브 잡스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누가 손해를 본 건 아니니, 1퍼센트의 소득이 더 늘었다고 세상이 부당해 지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소득불평등에 관한 최근 이야기들은 ‘질투의 경제학’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해진 토마 피케티도 성장이 부족해 불평등이 커진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균형 중 하나는 국민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이다. 그에게 국민소득 증가(경제성장)는 다수의 성공 기회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자본의 증가는 소수 소유자의 기득권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비율이 증가하면 기회보다 기득권이 중요해지는 불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이 비율이 감소하면 기득권보다 일반 국민들이 성공할 기회가 많아지는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지난 300년의 역사를 보면 이 비율이 유럽의 경우 600~700퍼센트다. 대표적으로 귀족 세습이 가장 중요한 부였던 18세기 유럽이 이랬다. 그의 자료에 따르면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전쟁으로 자본이 파괴되고 전쟁 후 고도성장이 이뤄져 이 비율이 감소했지만 1970년대 이래 다시 경제성장률 감소하고 소유권을 더 강화하는 제도 개혁이 이뤄져 이 비율이 예전 수치로 복귀 중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로 한국에 소개된 신제도주의학파의 대런 애쓰모글루도 불평등은 근본적으로 성장의 문제라고 진단한다. 다만 그는 국가 내부 불평등보다 국가 간 성장 격차로 인한 국민 간 불평등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1퍼센트 부자와 나머지의 격차로 발생하는 문제보단 한국과 북한의 경제성장률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두 국민 간의 삶의 질 격차가 인류에게 더 큰 문제란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런 성장 차이는 국민 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정치제도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괄하는 정치제도는 더 많은 시민들에게 성공 기회를 줄 수 있는 경제제도를 만들고, 그런 경제체계가 좀 더 다양한 창조성을 만들어 경제를 더 성장시킨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자본주의는 왜 위기가 더 일반적인가?”

소득불평등의 원인을 성장의 부족으로 찾던 분배의 불공정성으로 이야기하던, 경제학이 공유하는 전제는 어쨌거나 제도적 개선을 통해 경제는 무한정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근본주의야 더 말할 나위없고, 임금주도성장론도 결국은 노동자의 소득을 올리는 정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결국은 소득불평등이 해결되어야 더 성장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성장이 없으면 소득불평등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지금까지, 약 150년의 세계경제를 보면 현실의 자본주의는 이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안정적 성장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유럽 전역을 휩쓴 1873~90년 대공황, 인류를 벼랑 끝까지 내몬 1929~45년의 세계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70~85년 경기침체, 그리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그 허상이 드러난 2000년대의 금융세계화 성장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세계경제위기.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면 경제학이 전제하는 안정적 성장은 매우 예외적으로 20세기 중반에 잠깐 나타난 현상이란 점을 알 수 있다. 

도시 상하수도, 전기 공급, 개인승용차, 가전제품 등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생활수단들, 중산층, 국가복지 등의 사회체계는 이 짧은 성장기에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나머지 100년 이상의 기간에도 생활의 개선과 기술의 진보는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부분적 개선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경제위기가 빈번하게 발생해 효과는 국소적으로만 나타났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소득불평등이라 부르는 현상이다. 
 

소득불평등은 자본주의 위기가 나타나는 한 방식

이렇게 장기간의 자본주의 변화를 보면, 이 경제 체계를 가장 잘 분석한 것은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분석한 핵심 개념들을 통해 20~21세기의 소득불평등 문제를 분석해보자.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따르면 자본주의 성장은 기계를 투자했을 때 예전에 비해 노동자가 더 많이 생산을 하게 되는 상태다. 예를 들면 매년 1000만 원을 기계에 추가로 투자를 해야 연 100개 정도 더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공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1200만 원 을 추가로 투자하며 연 180개를 더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덜 투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투자하면 예전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게 되는 것을 성장으로 규정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의 사례를 보면, 1920년대 초부터 1970년대 초까지 약 50년 정도가 이 성장기였다. 설비, 건물과 같은 고정자본 증가율이 이전보다 연 0.9퍼센트포인트(4.4퍼센트→5.3퍼센트) 증가했는데,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1퍼센트포인트(1.3퍼센트→2.3퍼센트) 늘어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부가 만들어졌다. 

물론 1930~40년대 약 20년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그 효과가 제약적이긴 했다. 이 기간을 제외하면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황금기 30년이다. 미국의 중산층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적 의미로 자본주의 위기 시기는 성장의 반대, 즉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고, 심지어 더 많은 자본을 생산에 투자해도 예전만치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는 시기다. 종전 기술이 한계에 부딪힌 탓이다. 

1973~96년 시기가 대표적인데 고정자본 투자는 예전보다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예전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자본투자 증가율은 느는데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둔화되니 당연히 투하 자본 대비 이윤의 비율인 이윤율은 하락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는 것은 아닌데, 기업들은 이윤율 감소분을 상쇄하기 위해 투자를 늘려 이윤량을 증가시키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투자에 대한 자본의 부담이 커지는 만큼 당연히 이 부담을 전가하기 위한 계급투쟁도 거세진다. 마르크스는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경쟁은 성공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위기 시기에 손실을 떠넘기기 위해 벌이는 경쟁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레이건노믹스라 불리던 미국의 신보수주의 정책 개혁이 대표적이다. 레이건은 자본규제를 완화하고, 노조를 탄압하며, 노동시장을 유연화 해서 자본주의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노동자에게 가능한 더 많이 전가하려 했다. 결국 이 위기의 손실을 짊어진 다수 노동자들과 자본의 과실을 분배받는 소수 기득권층의 소득 격차는 급속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야기하는 위기는 매우 복합적이다. 위기라고 세상이 멸망하거나, 공장이 모두 폐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위기를 봉합하는 다양한 꼼수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금융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위기에 빠진 자본은 투자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투자로 이윤의 총량을 늘리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러다 보니 위기 시기에 오히려 자본이 부족해지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새로운 부가 충분하게 늘지 않으니 실제 자본 없이도 투자나 구매를 할 수 있는 신용이 확대되며, 실체가 있는 자본이 아니라 추측된 미래의 수입을 현재의 자본으로 만드는 가공자본이 급증한다. 이 시기에는 노동생산성이 오히려 증가하기도 하는데, 금융화를 통해 유동성이 좋아진 자본이 생산지 이동과 인수합병, 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구조조정 등을 통해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2004년의 미국이 그랬다. 고정자본 증가율은 예전보다 하락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전후 황금기만큼 증가했다. 미래의 임대료로 책정되는 부동산가격이 폭등하고, 미래의 배당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주식도 가격이 치솟았다. 사업주들은 공장을 저임금 지역이나 무노조 지역으로 이전하고, 노조가 없어진 현장에서 노동통제를 강화해 이윤을 늘렸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소득격차는 극대화된다. 금융화에 혜택을 받는 사람들(자산가나 금융매니저들)은 떼돈을 벌고, 반대로 생산현장에 노동하는 사람들(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은 소득이 감소한다. 최근 많은 연구들을 통해 밝혀졌듯이 이 시기 소득불평등의 핵심은 단순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격차가 아니라 노동자 사이에서도 산업과 직무에 따라 엄청나게 격차가 커지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은 이런 현상을 신경제니, 정보통신산업혁명이니 하며 칭송했지만, 역시 마르크스의 예측처럼 근본적 기술혁신이 아닌 금융화를 통한 위기의 봉합은 결국 더 큰 위기로 발전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를 맞아 새로운 이행을 하지 못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한다. 붕괴란 대공황기의 파시즘적 상황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일본과 같이 30년 가까이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긴 기간의 축소재생산 과정일 수도 있다.

최근 미국 경제성장률이 조금 나아지자 경제위기 회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미국 경제는 성장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지금의 미국 경제는 노동생산성 증가율도 줄고 고정자본 증가율도 주는, 말 그대로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자본이 축소재생산으로 진입하는 모습에 가깝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고정자본 증가율과 노동생산성 증가율 모두 기존의 절반으로 뚝 떨어진 상태다. 일찍이 이 양자가 동시에 줄어드는 상태가 긴 기간에 걸쳐 지속된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득격차가 줄어드는 건 당연히 기대할 수 없으며, 상위 소득자의 소득이 크게 늘지 않아도, 하위 소득자가 몰락하며 소득격차가 늘어나는 극단적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이제, 자본주의 너머를 기획해야

여러 경제학들의 소득불평등에 대한 원인 진단은 겉으로는 모두 그럴듯해 보인다. 임금인상을 하거나, 정부가 강제로 소득재분배를 하거나, 지대추구를 규제해 일 하는 사람이 좀 더 많은 인센티브를 받게 하거나, 포용적 정치 및 경제제도로 다양한 인적 자원이 능동적으로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거나,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경기 부양에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본 것처럼 현재의 위기는 단기처방으로 해결하기에는 구조적 성격이 너무 강하다. 자본 투자에도 노동생산성이 향상되지 않는 기술적 제약과 더 많은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자본주의 그 자체가 현재 위기의 원인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노조, 협동조합, 노동자정당 같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들이 생산과 소득분배의 보편적 제도가 될 수 있어야 하며, 노동자들의 권력으로 대기업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북한이나 몰락한 소련이 보여준 현실 사회주의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당’의 의한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조직으로 사회 제도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정책들, 투쟁들 모두 노조 스스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획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제 자본주의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조직들을 만드는 것이다. ●
 
 
덧붙이는 말

* 표의 자료 출처 구간별 시기구분은 《Is US economic growth over? Faltering innovation confronts the six headwinds》(Robert J Gordon, 2012)의 기술혁신에 따른 노동생산성 변화 구간을 이용. 1925년 이전은 필자가 임의로 구별. 고정자산의 1925년 이후는 BEA 고정자산 통계를 재구성, 고정자산스톡 1925년 이전 자료는 《American Economic Growth before the Civil War: The testimony of the Capital stock estimates》(Robert E Gallman, 1992) 자료 중 1840~1900 국민자본스톡 증가율을 사용. 노동생산성 1925년 이전 자료는 《The U.S. economy since the civil war: Sources and construction of the series》(Genard Dumenil and Dominique Levy, 1994) 자료 중 1869~1920년 노동생산성 증가율 자료를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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