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03 제2호

액션 히어로의 영광스런 과거 위태로운 오늘 <버드맨>

  • 홍명교 편집실 미디어 담당
 
한때 히어로 영화의 액션스타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배우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분)은 자신의 꿈과 명성을 되찾기 위해 ‘작품성’을 고수하는 연극 공연을 준비한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로서 화려하게 데뷔해 ‘리건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한 자아의 모습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조급해하고 강박에 시달리는 신경증자.
 
그런데 이 영화 어딘가 독특하다. 자못 심각한 주제, 브로드웨이에 다시 선 옛 액션스타의 좌절된 꿈과 희망이라는 ‘고리타분한’(?) 주제를 갖고 있음에도 곳곳에 코미디와 판타지적 장치들이 가득하다. 아무도 없을 때 공중부양하는 리건부터 시작해서 그의 귓가를 맴도는 ‘버드맨’의 환청, 그리고 영화 초반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단 한번도 끊김 없이 이어지는 카메라까지. 극장 안과 밖을 유려하게 옮겨 다니는 카메라는 어느 때는 리건의 방황하는 자아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리건의 정신을 쉴 새 없이 스토킹하는 유령 같기도, 또 어느 땐 스크린을 통해 옛 스타배우의 애처롭고 격정적인 모습을 보는 관객의 시선 같기도 하다. 이런 점이 이 ‘심각한’(?) 영화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
난 왜 항상 사랑을 구걸해야 하지?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미국 중산층 부부의 몰락과 슬픔, 권태, 사랑 따위에 대해 천착했던 미니멀리즘*적 작가다. 미국인들에게 카버의 소설은 모든 장밋빛 꿈의 몰락 이후에도 지속되는 지리멸렬한 삶에 대해 돌아보는 거울과 같다. <버드맨>을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34년 전의 이 짧은 소설을 불러와 가장 영화에 걸맞은 형식을 찾은 듯하다. 리건 톰슨의 갈망이 소설 속 화자의 그것과 절묘하게 조우한다.
 
한 네티즌은 이 영화가 일종의 마술적 사실주의**의 외피를 두른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리건 톰슨이라는 캐릭터 속에 삶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자아가 좌절하고 방황하는 지난한 과정이 독특하고도 마술적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버드맨>은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 안팎, 리허설과 프리뷰를 거쳐 첫 공연이 열리는 날까지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는다. 몇 번이고 연극의 리허설과 프리뷰가 반복되면서 영화 속 인물들도 한 꺼풀씩 자신을 드러낸다. 처음 그것은 인물들의 진짜 모습을 가리고 치장해주는 일종의 가면 같은 장치였지만 나중에는 그 가면 뒤의 진실을 드러내고 세상 앞에 알몸으로 서는 자리가 된다. 마치 인생 혹은 세계라는 무대가 어떤 변곡점을 계기로 찬란하게 치솟았다가 끝을 모르고 추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몰락하는 중산층

리건은 좁게는 미국 베이비붐 세대를 대표하는 한 실패한 가장, 넓게는 중산층 사회에 대한 은유다. 한때는 번드르르한 ‘아메리칸 드림’과 헐리우드 영화 속 액션 히어로로 상징되었지만 지금은 극도의 히스테리를 지닌 고꾸라진 대장, 오늘날 헤게모니의 위기라는 비탈길 위에 선 그 미국 말이다.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불러온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는 다양한 모순을 낳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도시에서 시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고, 찬란했던 경제성장기 선진국 조직노동자들의 힘으로 일구어진 소비자본주의의 신화는 무너진 지 오래다. 하나의 영화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 층위부터 복합적이고 사회적인 층위까지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다분히 동시대적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냐리투 감독은 자신의 역작 <바벨>(2006)에서도 선진국 중산층의 좌절과 몰락을 드러낸 바 있다. 그의 영화에서 중산층은 선의를 지닌 세계시민이지만 동시에 자본에 의한 세계화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좌절을 겪어야 하는, 불행한 인간군상이다. 이는 <버드맨>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겪어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바벨>에서 그것이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사연처럼 다뤄졌다면, <버드맨>에선 미시적이고 내재적인 것으로 다뤄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우발적인 사건의 연쇄를 통해 숨겨진 삶의 진실,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겠다는 야심은 포기하지 않는다.
 

 

헐리우드, 혹은 미국

<버드맨>은 헐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영리한 풍자극이기도 하다. 리건 역을 맡은 노년의 배우 마이클 키튼은 실제로 팀 버튼이 연출했던 영화 <배트맨> 시리즈의 첫번째(1989)와 두번째(1992) 영화의 주인공이었고 상업영화에 회의를 느껴 시리즈를 그만뒀던 장본인이다. 이후 ‘배트맨’ 가면이 조지 클루니에게 넘어가면서 키튼의 영광스런 시절도 사라진 바 있다.
 
영화 안과 밖의 리건(혹은 마이클 키튼)이 헐리우드 스타시스템의 어두운 면모를 대변한다는 점 때문에 영화는 ‘헐리우드 그 자체’를 은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헐리우드’는 맥도날드와 더불어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에 대한 중요한 상징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미 헤게모니가 문화와 정치, 경제 전반을 아우를 정도로 전방위적이라 여기진 않는다. 다만 그것이 몇 가지 강력한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그 중 하나가 헐리우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리건은 그 헐리우드의 형용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영화 역시 온갖 형용모순으로 가득하다. 날지 못하는 버드맨, 고꾸라진 왕년의 액션 히어로, 연기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한 배우. 우리의 오늘을 지탱하는 세계는 얼마나 위태로운가.
 

모호한 결말

영화 <버드맨>은 삶이 과연 비극인지 아니면 해피엔딩일 수 있는지 판가름 내릴 수 없도록 모호하게 끝난다. 그 앞과 뒤에 무언지 모를 사물, ‘새’의 추락이 있다. 동시에 영화의 앞과 뒤에 ‘모던 영화의 아버지’ 장 뤽 고다르를 연상시키는 타이포그래피 크레딧이 오르내린다. 이런 것들은 영화의 내용과는 별 연관이 없지만 이미지를 통해 감각적인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타당한 측면을 갖고 있다.
 
이냐리투의 <버드맨> 크레딧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에 대한 오마주다.
왼쪽이 <미치광이 피에로>, 오른쪽이 <버드맨>.
어쩌면 이냐리투는 <버드맨> 이후, 혹은 세계의 위기가 도래한 후 어떻게 영화적 언어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영화의 주요한 거점이지만, 끊임없이 언어의 작동방식을 파괴하고 있는 고다르를 소환하고 있는 것 자체로 그런 곤경을 드러낸다 할 수 있다.
 
헌데 이는 이냐리투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찾아온 난관인지 모른다. 오늘 우리는 이래저래 길이 밝혀지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서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때로는 멜랑콜리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때로는 막연하게 미래에 대해 환상을 품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담담하게 인지하고, 해방 혹은 구원이 이 비루한 현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 대안 세계는 주체들의 새로운 언어로서 구성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리건은 그것을 깨닫고 창문 밖 저 멀리 초월론적 세계로 비상했다.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영광스런 과거, 그러나 위태로운 오늘, 우리는 어디로 비상할 것인가. ●
 
 
 
*미니멀리즘 :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는 예술사조. 60년대 이후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 건축 등에서도 등장했다.
 
 **마술적 사실주의 :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인과 법칙에 맞지 않는 서사를 활용한 문학적 기법.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세계에 대한 서구적인 문화의 대응 양상이라면, 마술적 사실주의는 이에 대한 제3세계, 특히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성찰과 밀접히 관련된다. 문학에서는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이 대표적 작가들인데 이냐리투 감독 역시 라틴문화권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버드맨>에서 그의 실험은 이유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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