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반란을 찾아서
  • 2015/03 제2호

당신이 몰랐던 3.1운동

민중의 꿈, 분노, 행동

  • 작성 조경달 일본 지바대학교 문학부 교수, 한국 근대사 전공
  • 번역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3.1 운동>, 이응노, 한지에 수묵담채, 1945
 

무단정치와 고종황제의 죽음

말할 필요도 없지만 3.1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무단정치[1910년대 일본이 조선에 실시한 군인의 힘에 의한 강경 식민 통치책]가 너무나도 가혹했던 데 있다. 무단정치 아래에서 천황 직속의 조선총독은 군사, 사법, 행정, 입법 권력을 장악하여 소천황(小天皇)처럼 군림했다. 경찰은 헌병경찰이 보통경찰을 겸무하여 반일적인 움직임에 대한 정보수집, 탄압활동뿐 아니라 민중생활 전반을 장악했다. 일본인은 헌병경찰뿐 아니라 일반 관리와 교사까지도 일본도를 찼다. 반대로 민중은 청원이나 진정의 자유는 물론, 빈곤으로 인한 유랑이나 걸식의 자유마저도 박탈당했다. 그리고 폭력이 만연하여 한반도는 병영화되었다.
 
여러 근대화 정책도 반발을 초래할 뿐이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사적 토지소유가 확정되었으나 그 결과 증세가 이루어졌다. 삼림령으로 수목의 자유로운 벌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온돌에 필요한 연료가 부족하여 가혹한 겨울을 나야 했다. 화전 농민들도 쫓겨났다. 게다가 조선을 공업원료 공급지로 삼기 위해 면화재배와 일본종 뽕나무 도입을 강제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값싸게 사들였다. 군사목적을 위하여 도로, 철도, 항만 등의 인프라 정비를 시행했는데, 이것들은 대부분 민중의 부역과 ‘기부’라는 명목의 토지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금보면 믿을 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민중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화장을 강요하며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의무화 한 것이었다. 왕조시대의 민중은 묘지 선정이 자자손손의 화복에 관련된다고 하는 풍수설을 믿고 있었다. 이 문제는 3.1운동 당시 민중이 봉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총독부는 공적 의료 제도를 마련했지만 의료 시술 또한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도리어 무격[무당과 박수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통한 치료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무격 활동은 총독부가 박멸을 추진했음에도 집요하게 지속되었다. 총독부는 민족주의적인 사립학교를 폐지하고 동화교육을 추진하였으며, 회사령을 통해 민족자본의 성장을 저해하기도 했다. 민중들에게 있어 최대의 불만은 이상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민중들은 반근대적인 지향으로 거꾸로 내몰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사상계에서는 종말신앙이 유행했다. 대한제국 멸망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쇠퇴했던, 종말의 도래와 진인(眞人)에 의한 재생을 담은 《정감록》 신앙이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신흥종교는 대부분 금지되고 있었지만 지하에서는 다양한 종말교단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비극의 황제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돌연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독살설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 대부분의 민중들은 그것을 사실로 믿었다. 3.1운동이라고 하면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을 말한 14개조의 평화원칙에 고무되어 일어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민중은 윌슨 따위 알 리가 없었다. 고무되었던 것은 지식인과 종교인, 학생 등에 지나지 않았다. 민중은 이른바 33인의 종교지도자와 지식인, 학생 등의 의도와는 별개로 봉기했던 것이다.
 

3.1운동의 전개

고종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3월 1일에서 7일까지로 결정되었다. 전국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는 하얀 갓을 쓴 자들이 속출하였으며, 망곡식[임금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례]도 각도 각 곳에서 이루어졌다. 전국이 눈물의 도가니였고, 국장에 참가하기 위해 경성으로 상경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에는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이념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옛 양반층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그 이념에 친숙해져 있었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는 이런 틈을 타서 독립선언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학생과 민중이 폭력화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파고다공원에서 하기로 한 독립선언을 취소하고, 요리점인 태화관에 모여 만세 삼창만 하고 축배를 들려고 할 즈음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사전에 당국에 자수를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3.1운동은 최고지도자들이 빠진 가운데 학생과 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시가지를 향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민중이 수만 명에 달했고 시가지 곳곳에서 독립연설이 행해졌다. 시위행진은 가혹하게 탄압받았지만 운동은 왕성하게 전국화되었다. 서북지방(평안도)처럼 천도교와 기독교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경성의 소요와 국장을 목격한 이들이 돌아와 그 모습을 전달함으로써 운동이 개시되었다.
 
도시에서는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역할이 커서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태극기, 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여 민중을 동원했다. 〈독립신문〉 〈국민신문〉 등의 신문과 삐라가 수없이 배포되었다. 또 납세거부와 일본화폐 불매, 또는 일본인에 대한 상품불매와 고용거부 등이 이루어졌다. 노동자, 직공 등은 파업을 감행하였고, 학생들은 속속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상인들도 왕조시대의 관행을 따라 ‘철시(폐점)’를 함으로써 독립의지를 표명했다.
 
농촌에서도 학생과 지식인들이 수행한 역할이 적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는 농민이 주역이었다. 전국에서 체포된 자 가운데 55.6퍼센트가 농민이었다. 농촌에서는 전통적인 민란 방법에 의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왕조시대에는 양반유생이 민중들에게 추대되어 민란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스스로 주도자가 되기도 했는데 3.1운동에서도 똑같았다. 양반촌인 동족부락에서는 일족이 대거 운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양반유생이 면장이나 면서기, 이장 등을 지휘하여 민중을 동원하였다. 대부분의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에 장터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 방법이다. 지도자의 독립선언과 연설 후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취기에 힘입어 참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위운동은 적게는 수십 명, 많은 경우에는 2만 명에 이른 경우도 있었는데 수백 명에서 수천 명 규모의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3.1운동에는 다양한 조선 민중들이 참여했다.
사진은 기생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시위집단은 태극기를 휘저으며 만세를 외치면서 평화적으로 행진했다. 그러나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쇄도하여 군수나 면장을 끌어내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찰서, 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본인에게 폭행을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더 나아가 우편국을 습격한다든지, 전봇대를 넘어뜨리고 교량을 불태우는 파괴행위에 나서거나 통신, 교통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당한 뒤에 무기를 든 항쟁으로 이행해 갔다. 욕구불만을 함축하고 있는 민중이 소요를 축제화했을 경우 자진해서 폭력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민중은 곤봉, 각목, 나무창 등의 원시적 무기를 소지하거나 많은 경우 자진해서 투석전으로 나아갔다. 일반적으로 3.1운동은 맨손과 맨주먹의 평화적 운동이었다고 이해되고 있지만 그 같은 이해는 민중사적 지평에 선 평가는 아니다.
 
더욱이 민중사적 시점에서 민중이 민중 나름의 자율성을 발휘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점과 헌병 숙사 등을 습격했어도 대부분의 경우 물품은 던지거나 소각할 뿐 절도에는 미치지 않았다. 또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참가 강제의 논리를 가지고 이루어졌으며 만세를 외치지 않는 자는 처벌당했다. 횃불행진과 산상봉화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민란과 같은 방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을 비난하는 산호(山呼)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도시락 지참으로 각지의 만세시위행진에 참가하거나 운동을 북돋는 ‘만세꾼’도 출현했다. 시위 선두에는 기생과 소년이 서는 경우도 있었고 농악과 나팔을 연주하거나 농민답게 큰 깃발이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미 조선은 독립했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시위운동은 마치 축제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사람들은 함께 만세를 외침으로써 조선인으로서 일체감에 취했다. 생각하면 조선민중은 병합 이전부터 집회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열광적인 만세소리는 지금까지 축적되었던 욕구불만이 일거에 분출되는 것이었다.
 
피해상황은 총독부 당국이 가능한 한 축소하여 보고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어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상해에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기록을 남긴 박은식에 따르면,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51명, 체포된 자가 4만 6948명이었다고 한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에 반해 일본측 피해는 관헌 사망자 8명, 부상자 158명, 파괴된 관공서는 경찰서 및 경관 주재소 , 헌병주재소, 군·면사무소 등 합계 278개소이다.
 

3.1운동에 대한 평가

3.1운동이 비폭력운동이라는 평가는 33명의 민족대표 측에 의한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상해에서는 대한임시정부가 설립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해외에 산재하고 있던 민족운동가들이 집결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전략이 주축이 되고 있었다. 후에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는 박은식은 그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는 3.1운동이 얼마나 비폭력주의적인 운동이었는가를 호소하는 데 힘썼다.
 
이 시기에 민족대표와 망명정객에게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세계의 인도주의에 대한 확신이 강했다. 따라서 운동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주자학적 전통에 근거한 우민사상이 작동하고 있었다.
 
3.1운동은 식민지조선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종교가와 지식인이 수행한 역할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화선을 끌어와 점화를 한 데 지나지 않는다.
 
조경달 저 <민중과 유토피아>. 
이밖에도 번역된 저서로
<식민지기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 
<이단의 민중반란>이 있다.
폭탄 그 자체는 민중이었다. 그리고 민중은 반드시 자신들의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 봉기했던 것은 아니다. 민중은 다분히 생활주의적 동기에서 봉기했던 것으로써 그것은 원시적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오늘날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민족주의 운동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식민지하의 민중운동이라고 하여 곧바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해방 뒤에 만들어진 신화이며 지식인의 언설에 지나지 않는다.
 
3.1운동은 민중에 있어 ‘배반당한 반란’이었다. 민중에게는 민중 나름의 유토피아사상이 있으며, 종말사상은 그것의 최상의 것이다. 모두가 배불리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민중의 절실한 소망이며, 부귀를 손에 넣는 바로 그것도 민중의 욕심어린 소망이었다. 민중의 유토피아는 3.1운동 뒤에도 억압을 당하는 가운데 계속되는데, 그것은 해방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민중의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서 계속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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