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02 창간호

강남1970 "땅종대 돈용기"의 부동산 느와르

한국 자본주의는 무엇을 먹고 자랐는가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사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10년 전 유하 감독의 첫 느와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로 놀라워했다. 우선 이 영화가 그때까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느와르 영화로서는 매우 매끄럽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수작이라는 점에서, 둘째는 유신시절 고교생들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한 시대의 모순과 구조화된 폭력을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터프가이’ 권상우가 참 모범적이고 순진한 캐릭터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는 <비열한 거리> <강남 1970>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거리 3부작’이 비슷하게 갖고 있는 특징이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소박한 꿈을 품었던 미성숙한 남성이 등장해 권력 혹은 자본에 대한 욕망을 품은 채 엇나가고, 비극적으로 소멸한다는 이야기. 느와르 영화의 일반적 공식을 따르면서도 압축적이고 폭발적으로 변천해 온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다루기에 프랑스나 헐리우드, 홍콩 느와르와는 또 다른 색깔을 지닌 게 바로 유하 감독의 느와르다.

“스타일리시한 액션영화, 슬로모션이 많이 걸리고 싸움의 합이 정확한 영화는 많이 봤고 재미가 없었다. 영웅적인 액션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비루하면서도 이전투구적이고 절실한 이미지의 액션을 하고 싶었다. 내 액션은 늘 드라마와 연결되어 있다.” (유하, 2006년 6월 20일, <씨네21> 인터뷰 중)

유하 감독은 액션씬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연출해왔다. 기존 영화들은 무예처럼 합을 맞추는 식이었지만, 그의 ‘거리 3부작’의 액션은 달랐다. 인물들은 때론 비열하게, 때로는 너무 처절하고 비참하게 실제 있음직한 모습으로 실제로 때리며 싸운다. 액션이라는 형식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거나 과도하게 이끌지도 않는다. 그의 영화가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권력은 폭력을 어떻게 소비하는가

<강남 1970>은 이 ‘거리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앞선 두 작품보다 더 정통적으로 느껴지는 느와르 액션 영화다. 그러면서도 현실적이고 한국적인 느와르 장르의 매력을 잃진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성기고 또 너무 다양한 폭의 내러티브들을 섞었기에 장황하기도 하지만, 느와르라는 틀 안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외지고 폭력적인 기억을 돌아보겠다는 야심은 여전하다. 

1960년대 후반, 서울교외의 빈민촌. 종대(이민호 분)와 용기(김래원 분)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고아 출신 넝마주이다. 여러모로 그곳은 서울에서 강제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이 모여 살던 광주대단지를 떠올리게 하는, 당대의 가장 그늘진 곳이다. 단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정권이 지시한 야당 행사 침탈 사건에 가담하게 된 종대와 용기는 불운하게도 생이별하게 되고 몇 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만난다.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건달의 삶에 들어선 이후다.

1970년 겨울 발표된 서울시의 ‘남서울개발계획’은 당시 참외밭으로 가득했던 강남의 땅값을 수십 배로 오르게 하고 이곳을 거대한 욕망의 도시로 만들었다. 이후 성수대교가 만들어지고 삼풍백화점이 세워지는 바로 그곳이다. 정치권력은 이 사업을 통해 권력재생산을 위한 자금을 조성했고 종대 같은 건달들은 무한반복되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소비’된다. 
 

멈출 수 없는 굴레

“넌 너무도 외로운 거야 / 너에겐 친구가 하나도 없지않니 / 그리고 아들아 넌 지금 후회로 눈물을 흘리고 있어 / 우리가 너의 외로움을 같이 나눠질게”
 
 
영화 속에서 몇 번이고 흘러나오는 프레디 아길라의 노래 은 훤칠하고 거칠지만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고독의 심연을 풍기는 건달 종대의 비주얼과 섞여 홍콩 느와르 같은 분위기를 내뿜는다. 감독은 <비열한 거리>에서 대한민국 조폭이라면 트로트를 즐겨 불렀을 것이라는 이유로 당시 유행곡이던 ‘땡벌'을 부르게 하지만, 이번에는 보다 정서적인 곡을 택했다. 제목인 ‘ANAK’은 필리핀 타갈로그어로 ‘아들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사는 아버지의 입장에 선 화자가 세상의 풍파 속에서 변하고 추락하고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마치 고아인 종대의 유사-아버지 길수가 종대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길수는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일찌감치 깨달은 생계형 건달이다. 그는 끊임없이 그곳에서 벗어나려하지만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종대는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대상이 누군지 알면서도 복수하지 않는 길수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유사-아버지를 위해 복수하겠노라 결심한다. 그러나 그런 선택은 끊임없이 그를 외롭게 할 뿐이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랑도, 행복도 선택하지 못한다. 구조적인 폭력과 욕망의 굴레 안에 사로잡힌 이상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는 그 무엇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강남’과 폭력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은 왜 항상 강남을 배경으로 할까. 극도로 압축적이고 파괴적인 개발주의 성장의 일로를 걸어온 한국 자본주의에게 ‘강남'은 하나의 상징이다. 우리는 강남의 과거와 오늘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와 시스템을 들여다본다. 

<말죽거리 잔혹사>나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에서 드러나듯 유하에게 강남은 학교와 투기, 부동산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수되는 폭력의 역사다. 권력과 자본의 욕망이 투영된 강남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시공간적 은유다. 우정으로 이루어진 관계도 배신으로 귀결되고, 슬프게도 사랑은 불발되며, 소박한 꿈은 추악한 욕망으로 변하게 하는 곳이 바로 강남(혹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잔혹한 폭력들이 드러나지만 그 피칠갑의 당사자들마저도 실은 그보다 더 거대하고 구조적인 폭력의 희생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건달의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주역들은 비극의 모든 주인공들이 그렇듯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그 위에서 승리를 만끽하며 웃고 있는 것은 숨은 권력이다. <비열한 거리>의 황회장(천호진 분)과 <강남 1970>의 서태곤 의원(유승목 분)은 시스템의 이런 속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가

물론 그렇게 해서 정말로 영화가 감독의 의도대로 그것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뭇사람들에게 일종의 ‘자각'을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길수 역으로 열연한 정진영이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듯 <강남 1970>은 “만만치 않은 정치사를 담고” 있고 “시대의 불온성을 갖고” 있지만“그런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해도 관객들이 그렇게 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 (정진영, 2015년 1월 21일 ‘티브이데일리’ 인터뷰 중)이다.

과연 우리는 강남이나 폭력, 한국 자본주의의 이면과 비열한 매혹의 진실을 간파하게 되었을까? 스펙타클은 관객을 원하고자 하는 방향의 정반대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이를테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태도는 불가피하게 정형화된 여성의 이미지와 가족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스펙타클한 비주얼, 감정의 고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화려한 복수 따위는 시각적인 쾌락의 매혹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용으로서 불온하고자 해도 형식과 그림이 정반대를 표지한다면 작가의 정치적 의도는 실패로 귀결될 뿐이다. 마치 유하 감독의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실패하는 남성들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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