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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 창간호

노동자의 힘으로 흰 눈처럼 평등한 새해를 열자

광주시의 비정규직 대책을 보며

  • 이소형 공공운수노조 광주전남지부 조직국장

비정규직들에게 안녕하지 못한 새해

연초 광주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다. 12월 31일자로 근로계약이 해지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더 추운 겨울이겠지만 누구에게나 새해가 허락된 것처럼 흰 눈은 곱고 평등하게 쌓여있다. 요 며칠, 우리 조합원들은 마음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말 계약기간 만료에 따라 근로계약이 갱신되는 이 시간은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들에게도 근심과 불안의 시간이다.

1년짜리 근로계약서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동자에게 노조에 가입하여 사장에게 밉보이는 일은 생각도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다. 간접고용은 노동3권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고용형태이고,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기보다는 중간관리자에게 뒷돈을 건네고, 짤리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현실을 견디는 편이 더 낫겠다는 계산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노조를 만들어 요구를 제기하려 해도 ‘진짜 사장’을 교섭테이블에 앉힐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단체협약은 바지사장의 농락 속에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는, 바위 위에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과정과 같이 어렵고 척박하다. 
 

벽 앞에 서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워 왔다. 인간의 자존감을 짓뭉개고, 권리를 빼앗아 노예로 만드는 질서에 대항했다. 스스로에게 단결하고 투쟁할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부당한 현실을 바꾸고자 할 때 곁의 동료가 함께 손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내 사업장 바깥에 있는 동시대의 같은 처지의 수많은 노동자들의 연대와 지지가 존재한다는 확신도 품었다. 

이렇게 노동자들 스스로 지혜를 모아 만들어낸 ‘사회적 이정표’의 힘은 실로 위력적이었다. ‘단결권이 없어야 할’ 현장에서는 노동조합을 교육하고 있고, 협박하는 중간관리자를 투쟁으로 아웃시켰다. ‘바지사장’ 대신 ‘진짜사장’을 교섭테이블에 앉혔고, 파업을 단행하여 원청 사업주를 무릎 꿇게도 했다. 그렇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법과 제도가 치밀하게 빼앗아간 노동3권을 되찾아왔으며, 꿋꿋이 노동조합을 지키고 있다. 

그 힘은 현장 내부의 투쟁을 넘어 오늘날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직에 대해 어떻게든 대책을 내놔야 할 사회문제로 만들어 냈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총 3차례에 걸쳐 대규모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실행 중이고, 인천과 광주 등에서 공공부문 간접고용을 직접고용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의로운(!) 지자체장이라면, 내 지역 비정규직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한다’는 공식과 당위성이 만들어지고 있다.
 

광주시의 비정규직 대책은 투쟁의 산물

광주광역시 윤장현 시장은 지난 1월 5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고용개선대책을 발표하였고, 시본청 소속 청소·시설·청사방호 등 간접고용노동자 74명을 1차적으로 직접고용으로 전환하였다. 

공식 집계된 광주광역시 산하기관 비정규직의 현황은 총 1366명(간접고용 896, 기간제 300, 단시간 170)이다. 대책은 간접고용의 직접고용 전환이 중심이며 1차 74명, 2차 822명의 고용형태 전환을 단계별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전환 방식은 공무직(무기계약직이 아니라)으로의 직접전환과 간접고용에서 직접고용 기간제로 전환한 이후, 연구용역 결과를 반영해 공무직으로 전환한다는 구상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윤 시장은 취임 이후 임기 내에 광주시 본청과 시 산하 공사·공단, 출자·출연기관의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화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직고용 결정은 그 첫 결과물인 셈이다.

2015년 광주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책은 광주 지역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투쟁을 통해 제기해온 사회적 이정표를 광주시가 자신의 행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광주시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책은 ‘불쌍한 소외계층’에게 주는 새해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얼마간의 간접고용이라도 직접고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마음씨 좋은 시장님’이 베풀어주는 시혜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수천만의 인권, 노동권을 제약하는 잘못된 구조가 변화되고 있다는 사실로(!) 온전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부당함에 대한 항의보단 관리자에게 아부하는 편이 빠르다며 고개를 떨구고 돌아서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시의 행정까지도 단번에 바꾸어내는 결정적인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는 노동3권’에 있다고 알려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은 힘과 권한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을미년 새해, 윤 시장의 비정규직 정책이 그것에 희망을 품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흰 눈처럼 ‘평등하게 주어져 있는 권리’를 자각하게 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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