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반란을 찾아서
  • 2015/02 창간호

동학농민운동, 19세기말 조선 민중의 반역

우리의 반란을 찾아서 ①

  •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세월호 참사’로 대표되는 2014년은 참으로 가슴 아픈 한 해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젊은 넋들 앞에 용서를 빈다. 2015년 을미년에는 모든 이들의 귀중한 생명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한 해가 되길 염원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구본주 / 갑오농민전쟁 / 브론즈 / 1994 / 
   (출처: 구본주 추모 블로그 http://blog.naver.com/chan_ta/)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인 1894년에 이 땅에서는 거대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동학농민운동(학계에서는 ‘동학농민혁명’ 또는 ‘동학농민전쟁'이라 부른다)이 일어난 것이다. 한 기록에 의하면,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105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지난 30년에 걸쳐 연구해 보니 당시 인구 가운데 4분의 1에서 3분의 1에 이르는 민중이 봉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200만에서 300만의 민중들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그들은 봉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전라도 고부(古阜)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폭정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최후 진술을 읽어보면, 조병갑이 저지른 폭정은 고부군 한 곳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조선 팔도 대부분의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현상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19세기말 조선 민중들은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일컬어지던 지배체제의 모순 아래 지방관으로부터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제1의 배경이다. 

그런데 민중봉기는 단순히 외적 모순의 격화만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반드시 그 봉기를 주도하는 주체 내부의 어떤 질적 비약, 즉 변혁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19세기말 조선 민중들은 지방관들의 가혹한 수탈 아래 그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저항을 지속적으로 지속하고 있었다. ‘민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민중들의 저항은 군이나 현 등 지역 단위에서 단발적으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변혁적 지향 또한 『정감록』 신앙 등에 가탁한 엉성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민란은 지배세력에 의해 단숨에 제압당해 버리곤 하였다. 바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는 듯, 1860년에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보국안민(輔国安民)’이라는 변혁 이념을 비롯하여, 군과 현 등 지역을 초월하여 민중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접(接)과 포(包)’ 조직을 민중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외적 및 내적 조건이 두루 갖춰지게 되었다.        
 
정읍시 고부면에 있는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동학농민운동의 이상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음력 1월 10일의 고부농민봉기로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895년 음력 3월에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처형당함으로써 종결되는데, 이 운동은 1년 이상의 장기간에 거쳐 수백 만 민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된 19세기말 세계사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민중봉기라는 의의를 갖는다.  오늘날과는 달리 교통, 정보통신 등의 인프라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어떻게 해서 당시 민중들은 수백만에 이르는 대규모로, 그리고 1년 이상에 걸친 장기 항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일까? 동학농민운동이 대규모로, 그리고 장기간 전개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참여 민중들을 강고하게 결속시킬 수 있는 그 나름의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 동학농민운동이 지향했던 이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화 하나를 소개한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에서 모두다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홍종식, 「70년 사상의 최대활극 동학란실화」, 『신인간』 34호, 1929년 4월호)       
위에 인용한 내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도 서산에서 접주(接主)로 활약했던 홍종식이란 인물이 살아남아 자신이 왜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는지, 당시 민중들이 왜 다투어 동학농민운동에 뛰어들었는지를 회고한 것이다. 이 내용에는 첫째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민중들이 사인여천으로 대표되는 동학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실감나게 실천하고 있는 모습과, 둘째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서로 도와주는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전통, 즉  동학이 지향하는 평균주의적 이상 아래 민중들이 단결하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요컨대, 동학농민운동이 지향하고자 했던 이상은 신분제 해체를 통한 만민평등의 사회(평등주의)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서로 나누고 돕는 유무상자의 사회(평균주의) 건설에 있었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의 급진화 과정

동학농민운동은 한국사나 세계사에서 흔치 않는 비일상적 사건이었다. 오백년에 한번 또는 천년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대규모의 그리고 장기간에 걸친 민중들의 무장투쟁이었던 것이다. 동학농민운동 희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가운데 최소 3만에서 5만은 침략자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2013년에 필자는 농민군 학살에 동원된 일본군 병사의 종군일지를 공개한 바 있는데(한겨레 2013년 8월 29일자), 그 일지 속에는 당시 일본군이 몽둥이로 때려죽이고(장살), 대검으로 찔러죽이고(돌살), 불태워 죽이고(소살), 총살하는 등 온갖 야만적 방법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왜 동학농민군은 일상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무장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근대식 무기와 전술을 갖춘 일본군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면서도 그 비극적 항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전봉준 장군은 최후 진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부득이하여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부득이하여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예컨대, 고부농민봉기 이전에 전봉준은 고부군수 및 전라감사에게 부당한 세금을 감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진정하였지만 모두 쫓겨나고 말아 부득이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한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 전주성 등지에서 조선정부군과 혈전을 벌인 것도 정부군(경군)이 먼저 공격해 왔기 때문에 부득이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대혈전을 벌인 것도 일본군이 먼저 경복궁을 불법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볼 때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무장을 하고 정예부대인 조선정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이유, 즉 동학농민군이 급진화한 결정적인 이유는 ‘합법적’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층에 의해 모두 좌절된 데 그 원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윤 / 칼노래 / 판화 / 1985


        
동학농민운동이 후대에 끼친 영향

동학농민운동은 19세기말 세계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이었으나 조선왕조 지배층의 무능,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그리고 신분제라는 기득권 수호에 눈 먼 보수 지식인들의 탄압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분출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한 민중들의 새 시대를 향한 열망, 즉 변혁을 향한 열망은 결코 끊기는  일이 없었다. 

예컨대,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만민평등의 이상은 지배층을 각성시켜 신분제를 폐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되었으며, 유무상자로 상징되는 동학의 평균주의적 이상은 ‘폐정개혁 27개조’로 구체화되어 갑오개혁(1894)과 광무개혁(1896)을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운동 당시 내걸었던 ‘척양척왜’의 반침략주의 노선은 한국 근현대 민족 민중운동의 원류(源流)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끝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민중들의 꿈이 담긴 <무장포고문>(1894년 음력 3월 20일 포고)의 일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에 사는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어 팔도가 마음을 함께 하고 억조창생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건질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와 같이 동학농민운동은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일방적인 다스림의 대상으로만 간주되어 오던 민초들이 역사의 주체로 당당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대사건이었다.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갑오년 당시의 동학 민중들! 그 민중들의 DNA는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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