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특집
  • 2015/02 창간호

희망이 사라진 시대, 극우를 택하는 청년들

  • 이상욱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조직국장

길고 지루한 저성장 시대의 청년들

지금 시대의 20~30대 청년들을 일컫는 수식어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자가 만연한 청년세대), 삼일절(31살까지 취직 못하면 길이 막힌다), 오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마련을 포기한 세대) 까지. 더욱이 이들은 앞으로도 기약 없이 이어질 저성장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야 한다. 최근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소설가 김영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기대 받는 것은 많지만 실제로는 기대 감소의 시대를 살아간다(‘기대 감소의 시대’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줄어드는 세태에 대한 폴 크루그먼의 표현이다)”고 말해 청년들의 많은 공감을 이끌어 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가능성은 점점 사라지고, 불안과 초조가 청년들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014년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고치인 9퍼센트를 기록했고 10~30대 사망원인 1위는 자살(2013년 사망원인 통계)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망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는 청년들의 선택이다. 긴 시간 축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극단적인 사건으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우리는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 몰려온 청년들의 폭식 퍼포먼스와 토크콘서트에서 벌어진 고등학생의 백색테러를 마주했다.  통념을 무너뜨리고 금기를 위반한 두 사건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젊은이들’이란 사실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일련의 사건들은 단지 깜짝파티와 같은 개별적인 일탈행위일까, 아니면 이 세대의 이념적 지향을 드러낸 징후적인 사건일까? 희망이 사라진 시대, ‘극우’를 선택한 청년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고등학생이 폭발물을 던져 혼란에 빠진 토크콘서트 현장
 

‘일베하는 젊은이들’의 세계인식

인터넷상에서 일게이(일베 게시판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줄임말. 일베 사이트에 즐겨 방문하는 사람들)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 전라도 출신에 대한 원색적인 경멸,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희화화’가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여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향한 이들의 도발로 인해 “(일베가)오프라인상에서는 실체가 없는 온라인 집단에 불과하다”는 이전의 평가는 뒤집어졌다. 그들 대다수는 20대였고, 조롱과 냉소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렇다면 일베의 주축인 청년세대는 그 속에서 어떤 특징을 보이는가. 우선 그들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여긴다. 자신들이 겪는 좌절의 원인이 특혜를 누리는 특정 집단에게 있으며, 그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특정 집단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행동 양태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화’를 훈장 삼아 도덕적 권위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꼰대 집단으로 인식된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나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서도 ‘사회적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역차별)만 주장하는 부도덕한 이기집단’으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유족들에게 너무 많은 특혜를 줄 것’이라며 반대했다. 

둘째로 그들은 스스로를 잘못된 인식과 사회를 바로 잡는 (선구자적) 집단으로 규정한다. 그들에게 진보·좌파진영은 과거 촛불집회 때부터 괴담과 선동만을 일삼고, 문제 해결에는 무능하면서 사회를 마비시키는 집단이다. 그래서 혼란 속에서 진실을 찾는 정확한 ‛팩트’의 전달자를 자임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팩트를 찾기 보단 민주화, 여성, 진보세력을 조롱하기 위한 장난감을 찾는 데에 힘쓸 뿐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폭동이라 주장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일베를 통해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하나의 ‘놀이’로 여기고, 적극적인 쾌락추구에 앞장선다.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행위(단식 농성장에서의 폭식행위)와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자극(광주민중항쟁 희생자 비하)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받으며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자 애쓴다. 
 
자유대학생연합도 세월호 단식농성장 앞 폭식투쟁을 계획했다가
논란이 일자 취소했다. 사진은 그 홍보물이다.
 

그들을 만든 것은 우리 사회다

일베의 청년들은 사회적 반향을 통해 자신들을 드러내고 증식해왔다. 그러나 지금껏 그들에 대한 사회 일반의 태도는 대부분 무시나 조롱(루저·낙오자), 그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혐오성 공격들(괴물·벌레·패륜아)이었다. 이런 대응이 그들을 우리 사회에서 제거하거나, 바깥으로 추방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했고, 대립구도는 오히려 강화됐다. 그럴수록 일베 유저들은 사명감에 차서 자신들이 설정한 정의에 따라 ‘적’을 공격해왔다.

일례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이나 노동조합을 이기적인 기득권 단체로 낙인찍는 공격에 극우청년들은 주저 없이 가담했다. 심지어 익산의 한 고등학생은 적에 대한 증오를 범죄로 분출하며 백색테러를 자행했고, 일베는 그를 ‘열사’라며 추앙했다. 일베로 대표되는 청년 극우세력은 반민주주의(민주화에 대한 반감)와 우파 이데올로기(안정, 힘에 대한 선호)로 결집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청년 극우세력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건강한 비판을 통해 무마시킬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낳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누구나 불안과 불만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일베를 낳았듯, 우리 역시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만약 미래가 절망적 오늘의 지속이고, 대안의 등장 가능성이 희박한 시대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지금껏 청년세대는 민주화 세력이 왜 위선적이고 무능한 어른으로 전락했는지, 왜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강요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학교에서부터 직장까지 폭력과 왕따 문화로 가득한 정글 같은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지 못했다. 

대안 없는 시대, 차악과 차선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으며 각기 다른 세대의 대중들은 서로 다른 입장으로 불신을 키워왔다. 나아질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세상에서 허무로의 무장은 필연이었다. 세상을 향한 청년들의 분노는 원인을 모른 채 길을 헤맸고, 정치적인 것의 위기와 함께 봉기의 가능성은 닫히고 말았다.
 
긴축 반대 시위를 벌인 키프러스 공화국의 젊은이들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 사람에겐 그것들을 지금 상태로 만드는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즉 “모순은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저항이 아니라 조롱과 혐오일지라도, 청년들의 극단적인 말과 행동은 우리 사회의 모순(기성세대의 모순, 그 중에서도 민주화 세대가 내세웠던 이상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지금의 시대)을 가리키는 것이고, 정치가 자리해야 할 장소는 바로 그곳이다. 

앞으로도 청년세대 극우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나 노동권, 대안사회를 향한 이념과 보편적 인권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파괴하려들 것이다. 그것들의 진전이 실제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 권리의 진전은커녕 후퇴를 막기에도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배적인 가치들에 대해 의구심을 던져 주체들이 자신의 질문들을 재배열하고 몰락한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건 백색테러를 저지른 오군이나 IS에 가담하겠다며 먼나라로 떠난 김군에게도 마찬가지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허무와 좌절을 밥 먹듯이 느껴온 우리가 그렇게 넋 놓고 허무에 이용당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건네야 한다.

그런 가운데 대안세력으로서의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고 사회운동적 정당운동, 노동조합, 시민교육운동의 길을 밝혀나가야 한다. 더 많은 대중들과의 접면을 늘리는 것 역시 긴박한 과제다. 그들이 극우 이데올로기가 아닌, 대안사회를 향한 민중의 정치, 노동에 대한 권리가 살아 숨 쉬는 사회의 가치가 얼마나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것인가에 대해 알리고 느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적대를 올바른 곳에 위치시키고, 대안정치를 재생시키는 과정 속에서 청년극우의 발호 역시 저지·지양되고 우리 세대의 허무주의와 냉소 역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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