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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2 창간호

보수의 매력은 명료함과 권력에 있다

  • 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지난 2012년 말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썼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를 통해 한국이라는 사회의 보수성을 짚은 책이었다. 어쩌면 그 책을 썼을 당시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더 보수화됐다. 

한국사회의 보수화는 상식이라고 믿었던 여러 가지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이었다. 국가정보원과 군의 조직적인 선거 개입이 드러났고, 몇몇 노동조합은 자신이 노조라는 점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 한 곳은 해산 당했다.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이 공식적으로 설치고 있다. 
전반적인 보수화는 당연하게도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보수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있다. 우리가 한국사회의 보수화를 막고, 보수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이전에 보수가 먹히는 논리에 대해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믿는다

보수(保守)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지킨다, 보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수 세력은 바로 현재의 구조와 전통을 지키려는 세력이다. 서양에서 보수주의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다. 영국 보수주의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에서 프랑스 혁명의 과격함, 폭력, 급진성을 비판했다.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은 ‘폭력’과 같은 프랑스혁명의 수단을 넘어 프랑스 혁명의 이념 그 자체를 비판했다. 자유, 평등, 박애. 인간이 이 같은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계몽주의’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이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에 반대한다. 보수는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점에서 ‘신만이 완전하다’는 기독교와 보수주의가 연결된다.

보수는 인간의 이성 대신 경험을 믿는다. 수백, 수천 년 간 누적돼 온 인간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구축한 현재의 질서를 신뢰한다. 따라서 보수의 관점에서 혁명은 위험한 짓이다. 혁명이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인간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는 행위이자 인간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수백 년 간 쌓아온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다. 

현재의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질서는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공산주의 혁명은 위험한 짓이다. 보수주의자 임광규는 2000년 《월간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자본주의는 결함이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의 결함이 드러나 있는 제도로서, 자본주의는 인간만큼 나쁜 제도이다. 그러나 인간을 자유롭고 풍요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서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전통 중 하나는 자본주의다”
 

불평등과 차별을 옹호한다 

보수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불평등’을 옹호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이전의 보수주의자들은 귀족정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비롯한 다수 대중의 정치참여는 폭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귀족은 더 많은 특권을 가진 만큼 더 많은 책임을 지닌 존재인 반면 평민은 권리도 책임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귀족이 없으니 이러한 생각은 사라진 것일까.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대중의 광범위한 정치 참여를 두려워한다. 2002년 대선에 출마했던 이인제는 노무현에 대한 노사모 등 대중의 지지를 ‘광기어린 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극우 소설가 이문열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정치인 낙선운동에 앞장서자 ‘김대중 정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홍위병’이라고 비하했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2008년 촛불시민들을 일컬어 ‘천민민주주의가 왔다'고 한탄했다. 

이 뿐 아니다. 한국사회에는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시하는 풍토가 매우 일반적이다. 학력에 의한 차별, 성별에 의한 차별, 청소년과 어른의 차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옹호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는 이유로 성소수자의 성적 결합을 인정하지 않거나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서 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귀족이 사라진 시대, 보수주의는 어떻게 진화 했나

귀족이나 평민 등 사회계급이 사라지고,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시대는 보수주의에게 위기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이 위기를 돌파했다. ‘자유’민주주의를 통해서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거로 보수 세력은 온갖 ‘반민주적’ 탄압을 가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존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제1의 자유로 꼽는 것이 재산권이다. 능력에 따라 재산을 마음대로 증식하고 소비하고 투자할 수 있는 자유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반대하는 이유다. 이들의 관점에서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복지정책은 도둑질이다. 재개발 정책으로 밀려난 원주민들이 시위를 하는 것도 기업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방해하는 짓이다. 

그리고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법치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시민과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위를 하면 법치를 내세워 처벌하라고 외친다. 정치학자 하버에 따르면 법의 지배는 민주주의 하의 대중의 위험과 비합리성을 억제하고 민주정치를 한정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 

민주주의 시대 보수의 또 다른 진화방식은 시장주의와의 결합이다. 누구나 시장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시장에서 펼쳐지는 경쟁은 공정하고 그로 인한 차별은 당연하다. 경쟁에서 이긴 기업이 진 기업보다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은 당연하고 더 ‘능력 있는’ 노동자가 많은 돈을 버는 것도 당연하다. 
누군가 불행하다면 그 원인은 구조가 아니라 게으른 개인 탓이다. 한 사회와 집단을 위해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를 맡아야 하고, 뛰어난 CEO가 고임금을 받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도 당연하다. 보수가 옹호했던 차별과 불평등은 시장 안에서 업그레이드됐다.
 
 

21세기 한국 보수의 두 가지 매력, ‘명료함’와 ‘힘’

지금까지 살펴본 보수주의자들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보수 세력이 힘을 얻는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 첫 번째는 보수의 논리가 매우 명료하다는 것이다. 반면 진보의 논리는 매우 복잡하고, 여러 가지 추가적인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대한문 앞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수의 논리는 매우 명료하고 간단하다. “저거 불법이야” 보수언론은 실제로 쌍차 노동자들이 불법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쌍차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라면 쌍차 노동자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매우 복잡하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조사권을 부여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논란이 불거졌을 때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특별법에 반대하는 보수세력의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헌법에 위배된다” “유례가 없다” 세월호특별법이 현재 한국의 질서를 위협한다는, 매우 보수주의자다운 설명이다. 반면 특별법을 지지하는 이들은 왜 특별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지, 왜 진상규명을 위해 조사권과 수사권이 필요한지 매우 자세히 설명해야했다. 

보수가 가진 또 다른 매력은 ‘힘’이다. 독립영화 <그 자식이 대통령 되던 날>에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진보적인 성향의 딸이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왜 한나라당을 지지하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에게 그들에게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아버지의 말은 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보수를 지지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들이 보기에 현재의 구조를 뒤엎자고 말하는 진보세력보다는, 현재의 구조 하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보수세력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이다. 

진보정당도 문재인도 박근혜도 똑같이 경제민주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똑같이 경제민주화 이야기를 한다면, 박근혜가 더 잘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박근혜가 진보정당이나 문재인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기업을 때려눕히고 기업을 더 많이 삥 뜯을 수 있는 권력은 힘없는 진보세력이 아닌 힘 있는 보수세력에게 있다는 논리다. 

보수세력은 이러한 매력 발산을 통해 점점 대중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고 한국사회는 더욱 더 보수화되고 있다. 진보가 보수에 맞서 대안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보수의 이러한 매력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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