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세계
- 2015/02 창간호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을 위한 세 개의 말
* 에티엔 발리바르가 샤를리 엡도 테러에 관해서 프랑스 좌파 신문 《리베라시옹》에 실은 글을 번역했다.
[ ]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옮긴이가 이해를 위해 덧붙인 것이다. 편집부에서 가독성을 위해 문단을 더 나눴다.
오래된 일본인 친구 가토 하루히사(전 도쿄대학교 교수)가 다음과 같이 [메일을] 썼다. “프랑스 전체가 애도하고 있는 영상들을 봤습니다. 매우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저는 조르주 울랑스키의 화보집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후 《카나르 앙쉐네》를 정기구독하고 있습니다. 저는 매주 《보프 드 카부》의 그림들[만화]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저는 책상 부근에 언제나 그의 화보집인 《카부와 파리》를 둡니다. 이 화보집에 수록된, 샹제리제에서 명랑하게 웃고 있는 관광객들인 일본의 젊은 여자들을 그린 몇몇 그림들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곧 이런 유보가 달려 있었다. “《르몽드》의 1월 1일자 사설은 이런 말로 시작됐습니다. ‘더 나은 세계? 이 말은 무엇보다 우선 이슬람국가와 이들의 맹목적 야만에 맞선 투쟁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을 거쳐야만 한다는,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모순적인 듯한 이 주장에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터키, 아르헨티나,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내게 메일을 보냈다. 모두가 연민과 연대뿐만 아니라 우려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안전과 민주주의, 문명에 대한 우려를 자신들의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사람들에게 대답하고 싶고, 이와 동시에 [논평을 해달라는] 《리베라시옹》의 권유에도 응하고 싶다. 지식인들이 특권 없이, 특히 특별히 명석하다는 특권 없이, 그러나 망설임도 없고 계산도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위험한 시기에 도시에 말들을 순환시키는 것은 [지식인에게] 지워진 의무이다. 오늘날, 긴급 상황에서 나는 서너 개의 말만을 내뱉고 싶다.
공동체
그렇다, 우리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애도를 위해, 연대를 위해, 보호를 위해, 성찰을 위해 말이다. 이 공동체는 배제적이지 않다. 특히 이 공동체는 프랑스 시민들이나 이주자들 사이에서 더욱 더 독성이 강해지고 있는 선전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길한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하는 선전들이 침략이나 테러리즘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공포, 빈곤, 환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는 그들[이주자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국민전선의 테제들을 믿는 사람들이나 우엘벡[1]의 산문에 매혹된 사람들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밝혀야 한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세계적 내전’이 촉구하는 감정, 책임, 이니셔티브의 분유[공유]가 국제적인 규모로,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 에드가 모랭은 완전히 옳은데) 가능하면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que) 틀 안에서 공동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한, 이 공동체는 경계선[국경]들에서 멈춰 서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공동체는 ‘국민적 단결’과 혼동되지 않는다. [국민적 단결이라는] 이 개념은 불쾌한 질문에 침묵을 강요하고 예외 조치의 불가피성을 믿게 만들려고 하는 등, 실제로는 수치스런 목적에만 봉사했을 뿐이다. 레지스탕스 자신은 이 용어를 내세우지 않았다(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국민적 애도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할 특권을 지닌 공화국의 대통령이 군사적 개입을 슬그머니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 용어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세계가 현재의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이 군사적 개입이 기여할 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 후, ‘국민적’인 정당들, 그리고 이 명칭을 담아야만 한다고 해도 국민적이지는 않은 정당들을 덫에 빠뜨리는 온갖 논쟁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마담 르펜과 경쟁하고 싶은 것인가?
경솔함
샤를리 엡도의 만화가들은 경솔했는가. 그렇다. 하지만 이 말은 다소 쉽게 쪼갤 수 있는 두 개의 의미를 갖고 있다(그리고 물론 이것은 여기서 주관의 일부를 이룬다). [한 가지 의미는 이들이] 위험을 경시하고 리스크에 대해,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영웅주의에 대해 애착을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건전한 도발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재앙적인 결과들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의 경우, 이미 낙인찍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느낀 굴욕감을 조직된 광신자들이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샤르브[Charb : 이 잡지의 만화가로, 이번 테러의 희생자 중 한 명]와 그의 동료들은 이 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경솔했다고 생각한다. 이 경솔함 때문에 그들은 희생당했지만, 이와 동시에 표현의 자유의 추구가 목숨을 앗아갈 위험이라는 것도 드러낸 오늘, 나는 이 첫 번째 측면만을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내일과 모레에는 (이 사태는 하루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두 번째 측면을 관리할 수 있는 더 지적인 방법에 관해,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측면과 모순된다는 것에 관해 숙고하고 싶다. 이것이 꼭 비겁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하드[성전]
공포에 떨게 하는 이 말을 내가 마지막에 내뱉는 것은 의도적이다. [지금이] 이 말의 모든 함축을 검토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의 단서만 갖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은 무슬림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설령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일까? 물론 [지하드주의자들과] 동류로 취급받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나, 쿠란이나 하디스[구술전통] 안에 살인을 호소하는 구절이 있는 양 지껄이는 이슬람 혐오증에 반대하는 것은 올바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지하드주의자들의 네트워크에 의한 이슬람의 악용에 대해 ― 세계 곳곳과 유럽 자체에서 주요 희생자들이 무슬림들임을 잊지 말자 ― 신학적 비판과 궁극적으로는 종교의 ‘상식’의 개혁 말고는 달리 응답할 수 없다. 이것이 신자들의 눈에 지하드주의를 사기로 보이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테러리즘의 치명적인 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하지 못할 것이다.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에서 모욕당하고 공격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쉽사리 그들 편으로 끌어당기게 하고, 또 점점 더 군사화되고 있는 국가들에 의해 실행되고 있는 안전보장 정책, 자유침해 정책을 쉽게 끌어당기게 하는 틀 말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의 책임이, 아니 차라리 무슬림들에게 부과된 임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말한 ‘우리’에 정의상 많은 무슬림들이 포함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자기네 종교 및 문화와 더불어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고립화의 담론을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받아들다면, 이미 아주 작아져버린 이런 비판과 개혁의 기회는 거의 없어져버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Footnotes
- ^ *[역주] 프랑스 소설가.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 당일에 발매된 소설 『복종』은 2022년 이슬람교에 지배된 미래 프랑스를 그렸으며, 사건 당일 샤를리 엡도의 표지는 이 소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