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2015/01 창간준비3호
내가 '직장인 운동권'이 된 이유
흔히 말하는 학생운동권 출신도 아니었고 노동운동에 대해 지식도 관심도 별로 없었던 내가 '노조' 를 만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노동자가 되고 나서였다. 졸업하고 취직한 곳은 마트였다. 적성이며 전공 같은 걸 생각해볼 겨를은 없었지만 정규직이었고, 대졸이라는 이유로 매장에서 똑같이 일하는 시간에 비해 많은 월급을 받았다. 처음엔 마냥 감지덕지였다. 취직이 너무 안되어 한없이 비참했던 날들을 보상받는 느낌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부조리하다' 고 느꼈다. 계약직보다 두 배 높은 내 인건비 때문에 한 명 비는 자리에 충원이 안 되는 걸 보면서 그랬고, 이모뻘은 되는 계약직 주부사원들에게 "~씨" 로 호칭하며 해라체로 말하는 직원들을 보면서도 그랬고, 직원과 고객이 붙었을 때 회사가 무조건 고객의 편을 드는 일을 겪고서도 그랬다. 그렇게 2년을 일하고 본사로 들어왔다. 유통업이라고는 편의점 알바도 안 해본 내가 겪었던 생소했고 힘들었던 시간들은 이제 군대 생활처럼 추억으로 정리되는 것인 줄 알았다.
본사는 이상했다. 점포로 발령받고 가던 날은 분명 사장님이 "점포가 살아야 회사가 산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회사가 살아야 점포도 산다" 였다. 회사를 살리는 건 대부분 비용 절감이었고 그 중에서도 인건비 절감이었다. 경제학 수업에 나오던 함수, 자본과 노동의 한계체감을 기술혁신으로 끌어올린다는 그 기술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노동비용을 줄였다. 잊은 줄 알았던 '부조리하다'는 느낌이 되살아나더니 갈수록 가슴을 꺽꺽 메웠다. 이듬해 1월, 어느 매장 미성년 미숙련 노동자의 오른손이 축산코너 육절기에 날아갔다. 축산코너 정규직 직원이 그만두고 고작 열흘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열여덟 살이었다.
미칠 것 같은 심정으로 어느 집회에 나갔다. 근 십 년만이었다. 집회의 슬로건이었던 "함께 살자!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가 평생 처음으로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색하게 팔뚝질도 하고 귓가에 기억나는 민중가요도 따라 불렀다. 도심행진을 했고, 우리 회사 그룹본부 앞도 지나갔다. 그 앞을 지나는 순간 가슴을 쭉 폈다. 뭔가 당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그중에는 '노조' 를 만들어봐야겠다는 결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당당하게 일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굳히고 나서 주변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받았다.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너 혼자 희생되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 최소한 너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는 사람 열 명을 만들어라." (그는 내 학교 선배고 지금 한 진보정당에서 일하고 있다.) 열 명을 만들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 말은 아직도 오래된 명저의 경구보다 생생하다.
최근에 영화 <카트>, 웹툰 <송곳> 등 마트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주제 자체가 노조와 노동쟁의다. 모티브가 된 실화에서도 그렇고, 남들을 위해 가장 헌신했던 사람들이 지도부라는 이름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마지막까지 희생되었다는 사실 앞에 고개가 숙여짐과 동시에 두려움도 든다. 열 명을 만들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열한 번째 정도 자리에 서고 싶다는 게 부끄럽지만 본심이 아닌가도 싶다. 내 모든 걸 걸고 난 뒤, 그 결과가 승리가 아니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나에게는 아직 없다.
육절기에 날아간 그 오른손을 가슴에 묻고 꾸역꾸역 이것저것 해본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많은 집회에 나갔고, 여러 단체에 후원을 시작했고, 만날 일 없었던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만났다. 예전엔 안타까워하던 일에 분노하게 되었고, 신문을 덮게 하던 기사를 정독하게 되었고, 소소한 사생활이나 올리던 SNS 때문에 아무 데서나 턱없이 눈물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이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진행형이고 싶다. 나는 아직 배우는 중이고, 더 성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일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