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책보다
  • 2015/01 창간준비3호

여백과 리듬이있는 그림을 보며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 길지혜 꽃피는학교 교사
말 잘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말을 구사한다. 상대에게 빈틈을 주지 않는다. 틈을 주는 순간 강한 악센트가 흔들려 완벽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낙서라도 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어도 상대의 표정을 살피지 않는 강직함도 필수요소다. 해박한 지식을 나열하면 상대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술은 같이 마셨는데 그 많은 책 이름과 인용 문구는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외국 사람들을 인용한 말마디가 쏟아질 때마다 듣는 나는 영 소심해진다.

말 잘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의 귀, 눈,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불편해진 마음을 달래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 2003)을 펼친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이 한국의 아름다움을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도판 자료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자연, 문화 등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강연을 이어나간다. 강연자의 말투를 책에 그대로 담아내 강연장에 있는 느낌을 준다.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문 그림은 김홍도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이다. 편안하다. 에이핑크의 꽉 찬 무대를 보다가 통기타 하나로 노래하는 곽진언의 무대를 보는 느낌. 몸을 이완시키는 한숨이 나온다. 강연자가 제시한 대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시선을 옮겨보자.

소담하게 자리 잡은 매화 언덕, 주변으로 갈수록 옅어지며 자연스럽게 여백으로 녹아든다. 시선의 끝에는 노인과 동자가 조촐한 술상을 가운데 하고 배 위에 앉아 있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한 번 더 매화 언덕을 올려다본다. 노인이 된 눈빛으로 봄날의 매화를 바라보면 다른 마음이 일어난다.

편안한 그림과 좋은 대화의 공통점은 여백과 리듬이 아닐까? 느슨하다 빨라지는 선, 농담의 대비는 자연스럽게 리듬을 만든다. 상대의 시선을 고려해 텍스트를 배치하고 내 시선을 마지막에 제시한다. 내 주장만 내세우지 않는다. 여백의 공간을 둔다는 것은 그림의 마무리를 독자에게 넘긴다는 것이다.

작은 인원이 밀도 있게 만나는 대안학교 선생님으로 있다 보니 '말'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깨닫는다. 말을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스피치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지금은 말을 잘하기보다는 ‘잘 말하려고’ 노력한다. 간결하고 담백한 그림에서 편안함을 얻듯이 내 말도 상대에게 여백을 많이 내어주며 편안함을 주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말

'책 이어달리기'는 《오늘보다》의 독자들이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가지고 짧은 글을 쓰는 코너입니다. 추천하는 책의 분야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 코너는 글을 쓴 사람이 다음 호에 책을 소개할 사람을 지목하는 '이어달리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길지혜 씨가 지목한 다음 주자는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의 류상선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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