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5/01 창간준비3호

미카엘 하네케의 두 편의 영화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 <하얀 리본>

과거를 통해 현대사회 폭력성의 기원을 들여다보다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당대의 중요한 진실을 알아차리고 사유하기 어려워졌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인 대중매체가 현실의 중요한 이슈들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배양하는 공고한 틀이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촬영한 필름을 스크린 위에 상영했을 때부터 오늘날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산업으로 발전하기 까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영화들은 우리 안의 이데올로기에 의미 있는 파열음을 내기도 한다. 빈 구멍에 파고들어 우리가 세계의 숨겨진 진실을 응시할 수 있도록 안내하기 때문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에게도 그의 영화가 편안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영화 문법은 대중문화 문법에 훈련된 우리에게 익숙하지도 않고 다루는 주제들 역시 심각한 것들 투성이다. 각박한 일상의 안식처로서만 영화를 찾아야 한다면 하네케의 영화는 분명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우익 테러와 묻지마 살인, 사회적인 폭력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고자 한다면 하네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영화들은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폭력,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사유로 안내하는 힘이 있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 (71 Fragmente einer Chronologie des Zufalls, 1994)

1994년에 발표된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은 오스트리아의 어느 도심 은행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묻지마’ 살인 사건에 대해 다룬다. 영화 막바지 무지막지한 살인을 저지르는 이방인 청년은 1993년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 은행에 들어갔다가 어느 백인 남성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아무 대꾸도 없이, 분노를 품고 밖을 돌다가 다시 은행에 들이닥쳐 총을 꺼낸다. 그는 무차별적으로 은행 안의 사람들을 쏴 죽인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낡은 차 안에 들어가 스스로 입 속에 총을 겨누어 자살한다. 

사람들은 청년이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영화는 청년으로 하여금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 대해 직접 항변케 하거나, 도덕적인 시각으로 그를 단죄하려 들지 않는다. 청년이 겪은 우연한 마주침들을 몽타주(좁은 의미에서의 편집: 영화에서 쇼트들의 연쇄를 통한 변증법적 효과)로 보여줄 뿐이다. 주유소 주인은 청년에게 괜히 화를 냈고, 공중전화로 통화한 고향의 어머니는 청년에게 향수병과 우울증을 자극했다. 현대사회의 폭력, 이주민이 도시에서 겪는 고립감이 그를 끔찍한 허무로 안내했고, 청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향해 ‘공격’한 것이다.

영화는 아무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끔찍한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전형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지도 않고, 원인에 대해서도 설명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면을 보는 것은 영화의 형식이 담고 있는 미학에 대한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대체 왜 71개의 단편들을 조각내어 엇박자로 된 리듬의 몽타주를 이루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마주한 이 세계의 진실도 실은 이런 감춰진 원인들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얀 리본 (Das weiße Band, 2009)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이 현대 도시 속 이방인의 불가해한 비극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하얀 리본>은 과거를 통해 오늘을 본다. 나치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유럽 어딘가에서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기원을 파헤치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영화를 통해 가장 논쟁적이고 현재적인 질문을 던져왔던 미카엘 하네케는 이렇게 갑자기 100년 전 쯤으로 돌아가 외딴 마을의 일화를 그리고, 그 작은 역사를 통해 당시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 타자에 대한 배제 이데올로기의 동학을 묘사한다. 사건의 특수성을 통해 유럽이라는 총체성을 응시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추상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참혹하고 잔인한 면모’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영화가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과거’,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만연한 그 과거의 공기 때문에, 서유럽 문명사회의 체증(滯症)과도 같은 반유대주의와 배타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에는 단 한명의 유태인도 등장하지 않으며, 시대적 배경 역시 2차 대전이 아니다. 오히려 나치즘과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1차 대전 직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잔혹사의 주역들이 바로 어린 아이들이라는 점,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행한 잔혹한 사건들을 지나고 나면 세계 전체를 처참한 살육의 장으로 끌고 간 첫번째 세계대전을 거치게 될 것이라는 점 때문에, 얼마 안 있어 ‘그들의 유럽’이 파시즘의 광풍 아래 휩싸이리라는 걸 섬뜩하게 예측할 수 있다.

과연 나치즘, 분자화된 개인들의 폭력과 배제의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우경화는 히틀러라는 ‘악마’에 의해 형성된 걸까? 오히려 히틀러 같은 인물이 배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가 출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세상은 왜 그렇게 추락했는가? 공황기 대중들은 왜 혁명이 아닌 파시즘을 선택했는가? 혹은 반유대주의는 항상-이미 잠재되어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 촌구석에서의 가부장 질서, 폭력, 복수, 치정, 분노, 삶의 불안과 허무주의가 겹쳐져 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재구성되고, 그에 따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차츰 ‘차이’에 대한 부정(이런 부정은 결국 ‘왕따 문화’와 인종주의로 귀결된다)으로서 ‘타자’를 보게 된 것은 아닌지, 그래서 결국 대중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자임하고 폭력을 가하는 불행한 역사를 낳게 된 것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이데올로기나 역사의 문제와 따로 떼어 얘기할 수 없는 당대의 폭력성에 대해 되묻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오늘 우리는 ‘반공주의’가 ‘종북’으로 대체된, 이른바 빨갱이든 조선족 동포든 모조리 배제의 대상으로 몰아버리는 끔찍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폭력마저 정당화되는 반지성적 우경화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이 광풍의 출발은 어떤 것일까? 영화로서 이런 문제들의 ‘기원’을 파헤치고자 했던 미카엘 하네케를 통해, 우리의 과거를 통해 ‘오늘’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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