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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 창간준비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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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열광도 매도도 필요 없다

  • 남종석 부산대학교 경제학 강사

피케티 열풍에는 이유가 있다

미국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 피케티의 저작은 한국에서도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체제라고 일갈했다.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피케티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폄하했고, 진보주의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복음’을 접한 듯 피케티의 작업에 찬사를 보냈다. 

피케티에 대한 진보주의의 열광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의 진보주의 역시 양극화 해소, 불평등 해결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은 시장 규제, 세금 인상, 보편 복지, 실질임금 향상을 통한 경제성장 등을 중요한 의제로 삼고 있다. 이들은 피케티의 저작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를 발견했던 것이다.

피케티에 대한 미국 사회의 열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미국은 현재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유례없는 부의 집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CEO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임금보다 200배가 넘는 보수를 받고 있으며, 소득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부의 70퍼센트를 차지하고 하위 50퍼센트의 인구는 전체 부의 3퍼센트만을 보유하는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가 미국이다.

그러나 피케티 열풍을 단지 현실의 불평등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21세기 자본』은 통계자료를 통해 멀게는 지난 300년간 부가 어떻게 계층적으로 배분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방대한 자료를 통해 부의 계층적 분포, 부의 형태 변화, 국부통계의 역사, 조세의 변천과정 등 불평등과 관련된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시간적 범위와 공간적 범위에서 피케티의 자료보다 더 포괄적인 분석은 당분간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작업을 독보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 장기 데이터는 자본주의란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체제임을 선언한다. 피케티는 불평등의 원인을 시장실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에서 찾고 있다. 더불어 그는 인구성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의 편중은 자본주의를 세습사회로 변모시키며 지대추구가 이 체제의 본질적인 특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논의를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도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장을 정당화 하고 계급 간 조화를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기여에 대한 정당한 몫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더불어 비록 불평등이 있을지라도 자본주의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노동자계급의 삶도 개선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케티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도구를 가져와 반대되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의 책이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피케티는 불평등이 예외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필연적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정부 개입의 필연성을 주장한다. 불평등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세계의 모든 금융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부유세와 같은 자산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케티의 논의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제시하는 온건한 해법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그는 민주적 토론공동체의 합의를 강조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인 관점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의 힘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다. 피케티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정치공동체와 여론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을 자각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다. 피케티는 자본주의 사회가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고 이 체제 내에서 모순을 치유하길 바란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피케티의 자본주의 법칙

피케티는 주류 경제학의 논리를 가져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피케티가 자본주의의 제1법칙이라고 명명한 것(자본소득분배율(α)=자본수익률(r)×자본/소득비(β))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콥더글러스 생산함수와 국민소득의 항등식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원래 이 항등식은 자본과 노동이 각각 생산에 기여한 만큼 소득분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또한 그가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이라고 한 제2법칙(자본/소득비(β)=저축률(s)/경제성장률(g))은 케인즈 경제학의 경제성장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피케티는 이 법칙들을 활용하여 경제성장률(g)이 언제나 자본수익률(r)보다 작게 됨으로써 자본소득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또한 피케티는 노동소득배분율도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임금 상승을 요구하면 자본가는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임금비용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가져가는 몫은 줄어든다. 피케티는 이를 역사적으로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다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대체탄력성이 1보다 높다는 것은 임금상승률보다 고정자본의 증가가 더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임금상승률보다 높으며,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한다. 물론 그는 왜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큰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답변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주류경제학의 방법을 수용했다고 우리가 그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피케티 자신이 자본주의의 법칙이라고 한 것들이 정교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1퍼센트 대의 성장에 수렴한다고 주장하지만 왜 저성장으로 수렴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큰 이유에 대해서도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장기적인 역사적인 데이터를 고찰해보니 그렇다고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렇다’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경제학은 주어진 데이터의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이지 데이터 그 자체가 경제학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 경제성장률, 대체탄력성 모두 역사적으로 관측되는 것이라고 말할 뿐 왜 그런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논리와 체계가 없으며 경기변화와 구조변동이 없다. 더군다나 18세기, 19세기의 데이터에 기초하여 21세기의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과거의 장기 데이터에서 비롯되는 추론이 갖는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경제법칙들은 법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유토피아적이지만 비난할 수 없는 대안

피케티는 1980년대 보수주의 혁명을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노동소득의 정체와 슈퍼연봉을 받는 CEO와의 격차 증대, 다른 하나는 누진세 체계의 약화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소득 최고구간의 과세율이 대폭 하락하자 기업 리더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임금을 인상했다. 반면 노동소득은 정체한다. 과세체계도 근본적으로 변한다. 최상위 소득구간의 소득을 보장하는 자산소득에 대한 세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진 것이다. 더불어 상속세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소득세보다 훨씬 낮게 책정된다. 

피케티는 이런 흐름을 거슬러 사회국가의 강화를 주장한다. 피케티가 사회국가라 부르는 것은 서구 복지국가를 의미한다. 의료와 교육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고, 노년층의 생활안정을 보장하는 국가체제가 그것이다. 그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토대로 시민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 불평등이 공동체 전체의 편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때 한해서만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롤즈가 『정의론』에서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리의 평등만으로 사회적 불평등이 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은 근본적으로 고장 난 체제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것은 상속세 등에 강력한 누진률을 적용하고 자본세를 도입하는 것이다. 자본세란 소득세가 아니라 소유하는 자산에 부과하는 세금을 일컫는다. 한국에서 논의되었던 부유세와 같은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불경기에 일률적으로 세금을 인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세계인구의 최상층에 자본세를 부과한다고 해서 이들의 경제활동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것도 아니며 경기침체를 야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본세는 최상위 계층의 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방지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유세보다 더 흥미로운 주장은 금융정보가 투명하게 공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피케티는 현재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자본도피가 존재하고 비밀을 엄격하게 보장하는 역외 금융센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각 국가가 자국 부유층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개별 국가가 투명하게 금융정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누진세를 적용한다면 자본도피가 더 광범위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피케티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자국 시민들의 금융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국가와 금융기관들에 대해 경제적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제안한다. 

금융정보 공개에 대한 국제적 노력은 실현가능한 추진과제가 될 수 있다. 물론 현재와 같이 로비집단이 정치권을 완전히 포획한 상태에서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 같은 시도가 진지하게 검토되려면 광범위한 사회적 압력이 행사되어야 한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토대는 미국과 유럽 사회운동의 힘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권은 여전히 금융계의 이권을 실현하는 주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 피케티는 공론장에서의 민주적 토론을 통해 합의가 가능하다고 낙관하지만, 그것은 사회적 요구와 압력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피케티의 주장이 유토피아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유토피아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 동안 진보좌파 역시 역외금융센터에 있는 자금을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피케티는 이런 도피자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 가운데 하나를 제안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이런 주장은 일본, 중국 등이 동의하면 충분히 실행가능한 과제이다. 물론 한발 더 나아가 자본세를 도입하는 것도 고려해볼만하다. 피케티 자신의 주장처럼 어떤 자산규모에 대해 얼마의 세금을 부과할 것인가는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하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이런 자본세의 도입을 개별 국가가 아니라 모든 국가들에게 공식적인 규범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분명 역사의 진전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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