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필름X정치
  • 2014/12 창간준비2호

<내일을 위한 시간> 아이러니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네가 보너스를 포기하면 내가 해고되지 않을 수 있어”

  • 홍명교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교육선전위원
우울증 때문에 휴직했던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다니던 공장에 복귀하려 하지만 바로 난관에 부딪힌다. 회사가 그녀를 해고시키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회사로 찾아가 사장 뒤몽 씨를 만나지만 그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산드라와 친구 줄리엣이 항의하고 애원하자 그는 정 원한다면 다시 무기명투표를 하겠다 약속한다. 

이틀 후 아침 재투표를 약속받은 산드라는 남은 ‘1박2일’ 동안 동료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성과급 1천 유로 대신 자신이 해고되지 않기를 선택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Deux jours, une nuit>의 아이러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이 영화의 원제처럼 1박2일 동안 동료들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해야하는, 우울증환자인 그녀에겐 너무도 끔찍한 여정을 보내야 한다. 성과급을 포기하고 자신이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친했던 동료 셋은 전화통화만으로도 그녀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만, 이후의 만남은 전혀 녹록치 않다. 처음 찾아간 윌리는 그녀의 상황을 듣고 안타까워 하지만 딸의 기숙사 비용과 집세를 걱정하는 부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다음으로 찾아간 미레유는 보다 냉정하다. 이혼 후 가구들과 가전제품을 사야하기 때문에 보너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만남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그녀의 상황 속에 빠져 들어가 희망하고, 또 절망하며 잔혹한 아이러니 안에 깊게 관여하게 된다.
 
 
산드라의 힘겨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분열과 갈등, 그 감정의 면면을 본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에피소드’일뿐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산드라라는, 히스테리증적이며 자기혐오가 강한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 감정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동료들에게 일희일비하고 제각각의 번뇌와 갈등,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적인 상황에 괴로워한다. 자신이 이런 상황을 만든 ‘버러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당신이 아니라 회사가 만든 상황”이라고 위로하지만, 그녀 스스로 이런 우울을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산드라가 휴직하는 사이 회사는 어떤 효용의 틈을 발견했다. 17명이 아니라 16명이 일해도 충분히 생산과 노무관리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물론 나머지 16명의 노동자들은 초과노동을 해야 한다. 줄리앙은 이런 자본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람이다.
 
​“솔직히 말할까. 장마르(공장의 관리자)는 우리 공장이 16명만으로도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 그런데 왜 널 해고하지 않겠어?”
“하지만 줄리엣이 말하기로는 1주일에 3시간씩 더 일해야 한다며?”
“맞아. 하지만 돈을 더 준다면?”
17명이 일하는 작은 태양열발전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분열하고,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자기파괴적인 상황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부당대립의 상황에서 산드라는 보너스를 포기해달라고 부탁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다른 동료들은 좀 더 뻔뻔해져야만 한다. 물론 누군가는 산드라를 보자마자 펑펑 울면서, 지난번 투표에서 산드라의 해고(=보너스)를 택한 자신이 가졌던 죄책감에 대해 털어놓기도 한다. 동료를 ‘죽이는’(해고) 선택을 했던 노동자조차 스스로를 파괴하는 죄의식을 품었던 것이다. 반면 계약직 노동자인 알폰세는 보너스가 아니라 동료들이 무서워서 선택하기가 어렵다며, 이를 빌미로 회사가 계약연장을 하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얼마 전 대법원에서 2000여 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유효했다는 판결로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순간에 놓이게 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2009년 76일 옥쇄파업 시기 자본은 적극적으로 노노갈등을 조장하며 남는 자에게나 떠난 자에게나 고통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해고는 이처럼 자본의 효용을 위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기괴한 형식을 갖춘다. 

산드라의 모습은 다르덴형제의 전작 <로제타>(1999) 속 ‘로제타’의 끈질긴 생존본능을 닮기도 했고, <로나의 침묵>(2008)의 히스테리컬한 ‘로나’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영화들 속 인물들은 자본이 파괴해나가는 일상 한 가운데에 놓인, 고립된 인간의 자화상이라는, 우리 노동자들의 오늘을 드러내는 일관성이 있다. 벨기에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새해 첫 날 국내에 개봉하는 <내일을 위한 시간>은 1996년 데뷔한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다. 여러 언어들이 혼재하는 벨기에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왈롱 지역 노동자계급이 그들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다. 서유럽의 조용하고 외딴, 작은 공업도시에도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몰아치고 있다. 극심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삶과 감정이 어떻게 치달을 수 있는가를 소리 없이 따라가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작은 에피소드만으로 전체를, 깊게 이야기한다. 신자유주의 체제 이후 몰락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인물의 딜레마에 대해 다루며, 우리를 짓밟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비판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켄 로치에 대해 말할 때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좌파 영화감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또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어오는지, 그래서 다시 우리는 관계맺음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임을 안다면, 다르덴의 영화야말로 급진적 시선과 문제제기를 다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소재로서는 ‘정치’를 다루지 않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과 관계맺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누구보다 ‘정치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최근에는 더 극심해지는 절망적 현실에서도 낙관하며 계속해서 다시 시도해야 하는, ‘버티는 삶’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자꾸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화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우리의 전망, 오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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