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 노동보다
  • 2014/12 창간준비2호

삼성에서 노조 만든 주인공들의 500일 이야기

새로운 노동운동이 피어난다면 이렇게

  • 황수진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폭풍 같았던 1년여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2013년 7월 14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출범을 선포한 날부터 마침내 임금,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제대로 된 노조로 인정받기까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던 그 16개월을. 우리를 지켜주고 있을 가슴에 묻은 두 열사와 한 데 어울러 묶이고 풀린 그 1500명의 운명을.

쪼그라든 노조운동의 자신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세워야할지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사회 변화를 주도하겠는 포부는 찾아보기 힘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악다구니만 초라하게 남은 것 같기도 하다. ‘민주노조 사수’ 자체가 주요 구호가 되어버린 오늘의 노동자운동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 어쩌면 ‘사수’(지키는 일)를 주요 요구로 내거는 현실 자체가 우리의 자존감을 더 낮추고 있는 건 아닐까. 노조 깨기에 혈안이 된 자본과 그를 비호하는 정권을 탓하기만 해서는 바뀔게 없다는 뜻에서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투쟁의 경험은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노동권 확산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척 소중하다. 무노조경영 75년 삼성에 1500명의 젊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씨앗을 뿌렸다.
 
 
사회운동 초짜 활동가인 나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투쟁에 함께하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지만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노동운동 초보로서 무수한 위기를 넘으며 가시덤불처럼 험난한 길을 헤쳐가야 했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좌충우돌하면서 생채기도 갈등도 많이 생겼지만 그 자체가 생생한 배움의 과정이었고, 지혜를 모아 문제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그만큼 더 큰 기쁨이었다. 

나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노동운동에 할 걸음씩 나아가는 길에서 기존의 관성에 억눌리지 말고 그 고유한 힘과 개성을 통해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젊은 노동자들, 다양한 서비스 노동자들에게도 노조 할 수 있는 권리를 나눠줄 수 있는 주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동운동에 살아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변화를 추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그럴만한 거대한 에너지와 잠재력을 가진 젊은 신규조합원 집단이다. 
 

새로운 주체들이 새롭게 할 수 있도록 

“금속노조 스타일로 아직 잘 못하는데….” 노조 결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집회에서 발언을 권유하자 분회 간부들이 망설이며 했던 말이다. 하는 일이 고객들에게 ‘썰 푸는’ 것인지라 연대단위 간담회나 일대일 대화에서는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더니, 마이크를 주니 쭈뼛댄다. “금속노조 스타일로 안 해도 되니까 그냥 가슴속에 있는 얘기하시면 돼요”하면서 마이크를 쥐어줬더니, 기어이 금속노조풍 구호와 연설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발언 스타일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은 현재 금속노조 조합원 구성의 다수를 차지하는 제조업 노동자들이나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경험한 선배 세대들과는 하는 일도 다르고, 노조 경험도 다르고, 노는 방식도 다르고,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도 다르다. 이런 특성을 기존의 금속노조가 가진 정형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그래서 금속노조의 선배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빨리 배워야 하는데…”라고 하는 조합원들을 볼 때마다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하면 돼요”라고 말하곤 했다.
 
 
젊은 서비스 노동자들의 장점이 발휘되는 순간들이 있다. 노조 선전물에 대한 감각도 예민하고, 투쟁과 선전의 내용과 형식 등 다방면에서 아이디어가 많다. 시민 여론에 민감하고, 우리만의 언어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표현을 잘 한다. 하지만 이런 장점들은 그냥 발휘되지 않는다. 각자가 가진 능력을 발휘하려면 처음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수 있도록 자극하고, 북돋는 조직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팟캐스트 ‘다 녹아있네’, 염호석 열사를 추모하고 세월호 희생자를 위로하는 시청광장 카드섹션, ‘춤추고 노래하는 AS기사들’ 대학로 버스킹, 삼성본관 앞 족구대회까지…. 조합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획으로 멍석을 깔고, ‘힘들수록 즐겁게 투쟁하자.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되자’는 분위기를 함께 형성하니, 마침내 조합원들의 ‘포텐’이 터지기 시작했다. 참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이렇게 재주가 많은 노조는 처음 봤다.” 연대단체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다. 
 

공포를 넘어서 길을 만들어가는 이들

노동운동에 삼성만한 공포의 대상이 있을까? 삼성은 그야말로 ‘암흑지대’였다. 민주노조를 설립하려는 노력은 삼성의 견고하고 강력한 탄압에 번번이 짓밟혔다. 비명과 상흔이 남은 곳에서는 오랫동안 누구도 다시 용기를 내기 힘들었다.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공격하며 위축시켰던 표적 감사와 사장들의 폭언·협박, 건당수수료 임금제를 악용한 ‘콜 안주기’ 등의 탄압으로도 조합원 수가 줄어들지 않자 삼성은 폐업 카드를 꺼내들었다. 조합원들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였다.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떤 말과 행동이 두려움을 이완시키는지 잘 아는 간부들은 조합원들을 안심시켰다. 폐업은 노조 와해 카드이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단결해서 조금도 흔들리거나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역으로 삼성이 당황할 것이고, 우리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면 문제는 풀린다는 믿음이 지회 안에 굳게 생겼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의도를 읽고, 역으로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삼성은 우리가 폐업센터 앞에서 “우리를 다시 고용해 달라”며 떼쓰며 지쳐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는 대신 “굿바이 덕재(이천센터 사장 이름)”를 외치며 잔치를 벌였고, 지역사회로 뛰쳐나와 수많은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으며 지역 여론을 선도했다. 폐업 센터 조합원들은 아직 조직이 되지 않은 센터를 누비며 비조합원들을 만났다. 사측이 A를 하면 A를 반대하고, B를 하면 B를 규탄하던 투쟁은 결국 상대의 의도만 쫓아다니는 결과를 낳는다. 거꾸로 생각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판을 짤 수 있는 지혜가 나온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에는 삼성이 나쁘다는 비난, 삼성은 무섭다는 공포심 유포가 난무했지만 삼성을 제대로 알려는 노력과 토론은 부족했다. 최근 삼성의 노조 대응을 보면 노조 탄압 매뉴얼도 진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면 알수록 공포는 풀리고, 토론하면 할수록 나름의 길이 열린다. 분석하고 토론하고 부딪치면서 뛰어넘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들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다. 
 

하고 싶은 노조, 날마다 성장하는 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하고 싶은 노조’를 지향한다. 팍팍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은 여전히 무모한 도전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법제도가 매우 미비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여론도 안 좋고, 노조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까지 있는데, 누군들 하고 싶을 리가 없다. 
 
 
노조 활동의 성패는 노조를 하는 당사자와 그 가족들의 행복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다. 노조 활동은 세상과 관계 맺는 법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하고 싶은 노조, 성공하는 노조가 필요하다. 자신감이 넘치고 뭔가 해내는 공동체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다. “우리는 정당한데 세상이 나빴다”는 말은 힘이 없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조합원들은 이번에 실패하면 앞으로 다시는 못 할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반드시 성공사례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소진하는 조직이 아닌, 성장하는 조직이 되길 바란다. 이번 겨울에 특히 필요한 고민이다. 두 번의 열사투쟁, 50일의 전면 파업(또 날짜를 셀 수 없는 순환 파업), 100일 가까운 농성투쟁, 지도부 구속까지 쉴 새 없이 투쟁했다. 쏟아 붓느라 채울 시간이 없었고, 달리느라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조직 여기저기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보듬고 정비하고 충전할 때이다. 

노조 기본을 세우고, 기반을 닦는 것도 중요하다. 분회장, 조직, 교선, 법규 등 간부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는 소양과 실무능력을 기르고, 조직이 살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는 체계, 규칙 등을 정비하는 시간을 갖자. 

‘까는 것만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 투쟁만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명 한명이 전략가, 지식인, 전문가로서 성장해가는 노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삼성을 상대하는 우리라면 그 정도는 꿈꿔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이번 겨울,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당분간은 바지사장도 삼성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빛나는 미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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